주정인-01.jpg

글: 주정인 목사
<프리몬트 제일 장로교회>

 

내 조카 세현이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전도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며 제가 느낀것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제 조카의 상을 치룬 후 그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한 자매님으로 부터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삶과 죽음을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한 한 주간이였습니다. 
모두 다 부질 없는 것 같기도하고, 또 순간 순간이 아주 소중한 것 같기도 하고…” 한 사람의 죽음을 보고 그에게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우리 역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목적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깊이 생각해 보아야 겠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옛날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 했건만 그 소유를 지키려고 또 더 많은것과,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너무나 분주히 기계처럼 살아 간다.
생각 할 시간적 여유도 없고, 또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만족을 모른체 그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누릴수 있는 자유를 발탁 당 한 체 늘 쫒기며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인 빈곤 속을 살아가는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알지못하고,  삶의 목적이 없이 어찌 최상을 삶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해 어떻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겠는가?
   고대  로마의 사형수에게 주는 형벌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 
마당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커다란 통 두개를 놓는다. 
한쪽 통에 물을 담은 다음 사형수에게 하루 종일 계속적으로  한쪽의 물을 다른 쪽에 옮겨 붓는 것을 반복하게 한다.
아무런 목적도 알지 못한 채 그 무의미한 일을 계속하다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점차 미쳐서 죽어 간다고 한다. 
이것은 삶의 분명한 목적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비참함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Rest_in_Peace-01.jpg

 

라디오, 인터넷 또는 TV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눈뜨고는 보지 못한다. 
이 모두 삶의 가치를 모르고  살기때문에 부조리, 비정함, 무감각, 무관심시대 조류에 타협하기, 생각없는 행동,  제멋대로 흘러 가는 세상을 따라가기 등의 행동들은 모두 삶과 죽음의 참 의미를 생각 해 보지 않았거나 또는 알지 못함 때문이라도 생각한다.    
   물질만능 주의 속을 살아가는 현대 인들의 공통 관심사는 온통 물질이다. 
이 물질에  삶의 가치를 둔다.  그래서 육신에게 만족을 주는 것을 추구하여  여러 계획을 세우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것 전부로 채워도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큰 존재임을 알면서도 더 많은 것으로  채우려고 열심히 뛴다, 더 높은 곳으로 비약하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한다, 더 강해지기위해 약한자의 머리를 밟고 넘어뜨리고 멸시하고 그들을 이용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육신의 만족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이 삶에 어떤 의미를 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은 참된 목적없는 인생의 삶에 대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 했다. 
그는 그의 삶에서 경험한 바를 전도서에서 말하고 있다;  학문을 통달하고, 오묘한 지식을 알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향락을 누려보았고, 종교에 심취해 보았고, 부귀와 명예를 다 가져보았다. 곧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가져보고, 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고백을 하고 있는가?  무려 37차례나 걸쳐 “헛된 것이다.” 라고 못박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 악한 병’이라고까지 했다.(전6:2) 더나아가서  그는 “해 아래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고?”  반문을 했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이래로 헛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과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조카의 죽음 앞에서 그의 한 삼촌이 “하나님은 왜 가장 좋은 놈을 뽑아서 데려 가십니까?” 하고 애석해 하며 울먹이였다.
그가 애석하게 생각한 대로 그는 그런대로 멋있는, 자랑할 만한  생을 살았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세계 최고의 제약 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했고,  젊은 나이에 수석 연구원으로 뜻이 맞는 이와 만나 함께 회사를 설립해서 조기 심장병 발명 특허를 내어 과학자로 등록 되었고,  또 역시그간 다녔던  회사도 설립해서 암 항체 발견등  4개의 특허를 내어서 그 회사를 큰 기업으로 이루어 낸  재원이었다. 
한국에서도 재외 과학자로 소개되어 있다. 그가 특허를 낼 때마다 회사에서 듬직한 보너스를 건네 받곤 했다.  
   그가 죽은 후에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었는가?  죽은 후에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헛된 것들이 아닌가? 세상의 것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삶은 그렇지 않다. 삶의 헛됨을 선포한 전도자 솔로몬은  전도서의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하면서 하나님을 모든 것의 ‘궁극’으로 그는  제시했다.
곧 하나님을 배제한 삶은 허무한 것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삶의 참가치를 소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다.(전12:1) 잠언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신다. (잠1:7)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고귀한 존재로 창조 하셨고,(창1:27)  또한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3:11) 곧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

특집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