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교회인 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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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봉 목사


중국의 넓은 평원을 주변의 부족들의 집합으로 번성하게 되었는데,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중국평원을 통일하여 대제국을 세운후에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의 사람들과 무역업자들이 모여들어서 세계의 중심적인 국가가 되었고 세계 최고수준의 문화를 창출하였습니다.
진시황제는 기원전 3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아랙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오리엔트 정복을 나섰을 때에 유대의 시므온지파 사람들이 종군하였다가 그곳에 잔류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박토리아(Bactoria, 大夏國) 왕국을 세웠는데, 그곳의 큰 부자였던 려부이(呂不韋)라는 페르샤계 이스라엘 사람의 아들이 BC222년에 중국서역의 작은 부족국가들을 통일하여 진제국을 세워서 황제가 된 사람의 진시황제입니다.
그러므로 진시황제의 대개혁에는 유대교의 문화가 상당히 유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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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수르 아시아교회 솔로감독(왼쪽)과 필자


후에 이들의 자손들이 한반도 남쪽에 진한(秦韓)을 세웠고, 그 자손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고대 일본의 산업혁명을 이룩한 하다(秦)씨 가문으로 그들이 살았던 지역을 지금도 우즈마사(大秦)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뜻은 고대 씨라아어로 “예수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리고 오랜세월이 지나서 AD618년에 중국에 당제국(唐帝國)이 서게되었고 당고조(唐高祖)은 자신의 장자를 황태자로 세웠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차자인 이세민(李世民)이 황태자의 출입하는 현무문(玄武門)에서 자기의 형과 형을 도왔던 동생을 죽이는 난을 이르켰고, 그리고 부친인 당고조를 퇴위시키고, 자기가 제2대황제로 취임하였습니다.
자기가 비록 대제국의 절대권력자가 되었지만 자기의 양심깊이에 잠겨져있는 형제를 죽이고 부친을 황제의 위에서 퇴위시킨 불효 등을 지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자유스럽게 살수 있도록하여 전세계의 나라들과의 무역을 보장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고, 자기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기 조상들의 종교인 도교(道敎)신앙에 전념하였고, 후에는 유교와 불교에도 헌신하였으나, 일반적인 수도종교(修道宗敎)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보상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 여러종교에의 신앙순례도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할 수 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세계무역의 중심지였던 수도 장안의 국제시장인 서시(西市)에 모여드는 여러 종교를 믿는 상인들 중에 기독교인 상인들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는데, 당태종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아시아교회의 본부가 있는 에뎃사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 하였습니다.
아시아교회 본부에서 AD635년에 아로펜(Alopen)주교를 중심으로한 21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습니다. 당태종은 자기를 대신하여 제상을 국경선까지 파견하여 의장대로 정중하게 영접하고 수도의 장안에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게 하였고 자기 방에서 아로펜주교에게 3년동안 성경공부를 하고 마침내 성경의 속죄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죄를 대신지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가 대속함을 받게된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AD638년에 신교자유령(the Edict of Torelation)을 발표하고 자신이 예수믿기로 결심하고 전국에 교회당들을 세워주고 교회사역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가 쉬우면서 완전한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용서받들 수 없는 범죄행위는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다짐한 것입니다. 당시의 장안은 황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는 크게 부흥하였고, 선교사들을 위글족, 몽골족, 고구려, 발해, 일본 등지까지 파송하여 그들의 문자를 만들게 하여 성경을 읽게 하였습니다.
전세계의 문화의 중심지가 된 장안에는 우리나라의 불국사를 지으신 김대성 스님이나 일본 불교의 지도자들인 고-까이(公海)와 사이쪼(最澄)스님 등이 당에 가서 배워왔음으로 이들의 신앙에도 기독교적인 요인들이 잠재해 있음은 알아야 합니다.
후에는 구원의 복음이 세상을 밝게하는 종교라는 뜻으로 경교(景敎)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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