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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북2리. 

신흥동감리교회에서 샛길로 500여m 들어가면 삼인교가 나온다. 

이곳에서 산쪽으로 100m 올라가면 1980년대 한국사회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현장이 나온다. 
32명의 변사체가 발견된 오대양 공장 터가 바로 그곳이다.

지난 10일 탁지원 현대종교 소장과 찾은 오대양 공장 건물은 콘크리트 잔해만 남아 있었다. 

2개월 전까지만 해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지만 공장 터를 인수한 E업체가 철골을 뜯어내고 벽면을 부쉈다. 

관리인 A씨는 “그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서울 본사에서도 찝찝해서 그런 지 오대양사건 언급을 꺼려한다”면서
“며칠 전 용인경찰서에서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87년 8월29일 오후 3시30분. 300여명으로부터 200억여원의 사채를 빌리고 잠적했던 오대양 박순자 대표와 직원, 가족 등 32명이 이곳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고 현장은 민속공예품 제작사였던 오대양의 건물 천장이었다.

 이들은 모두 손발이 묶인 채 70여평 천장에 뒤엉킨 채 있었다.

사체는 부검 후 2일 만에 모두 화장 처리됐다. 

외부인에 의한 타살 가능성과 함께 집단 변사의 배후에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씨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오대양교 박순자 교주의 지시에 따른 집단 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은 ‘오대양교라는 신흥종교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박순자씨는 삼우트레이딩의 사채모집책이며 배후에 구원파와 유병언이 있다. 

이 사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탁 소장은 살해위협을 받았다. 

사채의 정확한 규모와 사용처도 밝히지 못한 채 수사는 종료됐다. 

하지만 ‘오대양 사건의 배후에 5공화국 실세가 있다’는 소문은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한강유람선사업 허가나 25억원 규모의 은행대출 등은 정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84년 유씨가 운영하던 삼우트레이딩의 컴퓨터 모니터 공장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은 91년 7월 재등장했다. 
구원파 신도 6명이 돌연 “자신들이 오대양 사건을 저질렀으며 박순자씨가 지시했다”고 자수한 것이다. 

자수범 중에는 구원파 창시자인 권신찬씨의 조카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수 1년 전부터 세모 간부들 및 현직 경찰들과 모임을 갖고 말을 맞춘 것으로 드러났다. 

박찬종 전 의원 등은 오대양의 사채가 세모로 유입됐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오대양의 사채가 일부 세모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포착됐다. 

박순자가 끌어들인 사채가 사채모집총책 송재화를 거쳐 유씨에게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그해 8월 유씨를 상습사기혐의로 구속했을 뿐, 무성한 의혹들의 실체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또다시 수사를 종결했다.

탁 소장은 “박순자씨는 유재순 강을석씨 등과 함께 세모에서 사채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했다”면서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박씨는 오대양교의 교주가 됐고 동반자살을 지시한 걸로 둔갑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40도가 넘나드는 여름 날씨에 공장 천장에서 32명이 공동생활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그때 사채의 흐름과 유씨의 행적을 철저히 조사했더라면 27년 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제2의 오대양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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