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의 역사가 나타나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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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기 전도사

(헤브론 교회)



신앙 간증문을 보내주신 강용기 전도사는
주님이 주신 경험을 항상 기억하며 앞으로
주님의 자녀로 사람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주님이 원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의 간증을 3차례에 걸쳐 계재합니다.
-편집자주-


“여 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나의 축복의 여정
나는 목회자의 자녀로 78년도 12월에 2남중 장남이자 장손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내가 태어날 당시 많은 목사님들이 축복의 손길로 나의 태어남을 축복해주고 또한 부모님께서는 장차 주님이 쓰시는 종인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며 주님께 서언하셨다.
이런 서언의 기도와 주님의 사랑으로 지금은 놀랍도록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 즉 복의 근원으로서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삶이 나에게 오리라고는 불과 3년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먼것이라 생각한 내 자신이 지금은 주님앞에 죄송스럽고 부끄럽기도 하다.
어렸을적 기억은 많지 않지만 초등학교때 6학년때 나의 꿈을 발표하는 학급시간에 목사라고 대답한것이 여렴풋이 기억에 난다.
그 당시는 단지 아버지가 전도사의 길을 가고 있었고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가고 싶은것이 나의 마음이었고 아버지가 나의 role model이 되었던 같다.
웃긴것은 그당시의 role mode이 지금의 role model과 같아졌다.
무슨말이지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당시는 멋도 모르고 그 모습과 호칭이 좋아 목회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이후 많은 role model를 거쳐 지금의 다시 아버지의 모습의 돌아간것 같다.
 이것에 대한 얘기는 후반에서 얘기하도록 하자 아버지는 원래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분이 아니었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가 박격포로 보직을 받았지만 주님의 계획과 사랑으로 인해 주님을 군에서 믿고 보직까지도 1년뒤 군종병으로 바뀌는등 그 당시 어떤 빽도 없던 아버지에게 주님은 아버지의 빽이 되신것 같다.
이후 아버지로 인하여 우리 가정이 바뀌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태어나게 된것이다.
어렸을적에는 단지 주일이면 교회를 갔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아버지가 교회 개척을 하셔서 내 유년기 시절에는 바쁜 부모님과 대화뿐아니라 오붓하게 밥먹었던 기억이 나에게는 없었던것 같다.
그만큼 예배에 심방에 가정보다도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하지만 이런 것이 자녀인 나에게 있어서는 많은 아픔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보다도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했던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건 아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응석받이로 커 와서 그런지 또한 장손이다 보니 작은아버지들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당시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이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은 나에게 있어 단지 잠을 자고 먹는 곳에 그치지 않았다.
그만큼 유년기 시절은 많이 외로움을 느꼈고 성격 역시 극도로 소심한 성격이었던것 같다.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 다르지만 혹자는 그런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하면 그럴수가 있는냐? 믿을수가 없다는 말투와 행동을 보이지만 당시는 극히 소심했고 아직도 약간은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성격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중학교 시절이 지나가고 개척을 한 아버지는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개척을 하고 개척하면 많은 성도들이 모일줄 알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뜬 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누 구도 개척에 대한 방법과 물질적인 후원이 없었고 아버지의 든든한 가족마저도 독실한 불자인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인해 또한 장남에 장손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를 다시 간다고 하니 누가 좋아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개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지하실 개척시 돈 500만원이 없어 청주 전시내의 은행을 돌아다니며 대출을 받기를 원했지만 담보도 없는 아버지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당시 파트사역을 했던 교회에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런 배경에는 파트사역을 할때 담임목사님께서 “강전도사 나중에 개척을 하게되면 한번 찾아오게나” 이 말씀만 듣고 두드렸지만 그 목사님의 대답은 '노‘였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만 당시 아버지가 받은 설움과 힘듦은 말로 표현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주님께 고백해서 지금까지 온 고백의 행동중 하나가 “내가 다시는 사람에게 손을 빌리지 않으리라” “오로지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겠다”라는 신념이 지금의 교회를 주님의 은혜로 건축케 하신것 같다.
 이런 지하실 개척이니 무슨 물질과 무슨 후원이 있었겠는가? 이런 환경속의 나는 중학교때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보고 자라났다.
당시 중학교의 학비와 입학금이 없어 그때 그때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고 쌀이 떨어지면 하루하루 걱정하며 살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동생이 태어날때는 산후조리할 방이 없어 아는 집사님 셋방을 얻어 어머니가 동생을 돌보기도 하셨다.
이랬으니 지하실 교회에서 사는 나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깥 세상을 나가기 전까지는 항상 교회의 삶은 어둠 그자체였다.
형광등의 모든 불을 끄면 당시 어린 나이에 교회가 무섭기도 할 정도니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웃지 않을수 없다.
주 님의 처소가 주님의 장막이 나에게는 두려움의 장소라니 하지만 이런 지하실의 10년 생활이 나에게 있어서는 씻지 못할 부끄러움의 기억이었지만 나중에는 나의 삶이 지하실의 어둠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찬란한 햇빛으로 변했으니 얼마나 나의 믿음이 연약하고 도마와 같은 삶을 살았던지 나는 27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이런 가난이 싫어서 졸업을 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 지긋지긋한 지하실을 떠나야 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의 모든 목표를 세우게 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왜 그리도 소박한 결심을 했는지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되나 싶을정도로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된다. 고 1 겨울방학때부터 내가 할수 있는 일을 찾을려고 간곳이 소위 말하는 “노가다”였다.
다시말해 가진것이 없는 나는 몸이 전부였기 때문에 일용직을 찾았던 것이다.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방학을 보내던중 갑자기 교회의 반주자가 되는 누나가 사정이 생겨 3개월 뒤에 반주를 그만둔다고 하자 당시 18살이었던 나는 어머니에게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게 된다.
앞으로 3개월뒤 피아노 반주자가 시집을 가니 네가 반주를 해야 되니 피아노를 배워라 하지만 상식상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단기간에 되는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남자인 나에게 그것도 당시 극히 소심한 나에게 이런 주문을 하다니 나는 이것이 못마땅했고 피아노치는 남자라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어떡하랴 어머니의 명령에 어쩔수 없던나는 학원을 보내주면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굴복하고 만것이다.
하지만 웃긴일은 돈이 없으나 아는 목사님의 자녀가 있는데 그 중학생인 자매에게 찬송가를 배우라는 것이다.
악기에 대해 누구나 알겠지만 이제 음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4부가 되는 찬송가를 칠수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베토벤도 아니고 하지만 주님은 베토벤까지는 아니지만 흉내는 낼수 있게 나에게 달란트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그 자매에게 나는 찬송가 한곡씩을 배우게 되었고 이후 나는 시디와 테이프로 된 찬송가를 들으며 오른손 2부를 외우고 왼손 2부를 외우고 다시 양손을 외우며 찬송가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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