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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쾌 장로

 

성탄일을 며칠 앞두고 젊은 목사님 한 분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이런 저런 담소 끝에 목사님이 저에게 묻습니다.
“장로님, 이것 아세요?”
“뭔데요.”
“제가 땡감 한 소쿠리를 사다가 지금 홍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땡감을 넓게 펴놓고 군데군데 사과를 몇 개 놓습니다.”
“왜 사과를 놓습니까?”
어렸을 적 저는 어머니가 홍시를 만드시는 것을 엿본 기억이 납니다. 땡감을 큰 소쿠리에 넓게 펴놓고 그것을 큰 항아리 속에 넣어두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한 겨울철에 장독을 열고 큰 홍시 하나를 꺼내주시면 껍데기까지 쪽쪽 빨아먹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홍시가 얼마나 크던지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왜 사과를 땡감들 사이에 놓습니까?”
“저도 잘은 모르지만 상관작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사과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사과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며칠이 지나고 나니 사과가 군데군데 멍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종내는 그 사과가 쭈글쭈글 해졌고 대신 땡감은 홍시로 변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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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과와 땡감이 한자리에 있으면 어떤 화학반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가 자기를 말려 홍시가 되도록 큰 작용을 한 것 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목사님의 마지막 땡감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장로님, 그 땡감들 중에서도 끝내 홍시가 안되는 땡감이 있더라고요. 그 떙감은 홍시도 아니고 땡감도 아닌 아주 볼품없고 쓸모 없는 말라비틀어져 쭈글거리는 땡감 흔적만 지니고 있었어요.”
목사님과 저는 사과와 땡감의 상관반응에 대한 흥미보다는 끝내 홍시도 못되고 땡감으로도 남아있지 못한 그 땡감을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땡감이 바로 우리들 아닐까요? “ 라는 말을 거의 이구동성으로 내놓으며 웃었습니다.
예수님(사과)께서는 우리들(땡감) 세상에 오셔서 피(땀)흘리시고 살을 찢으시며(멍) 우리를 변화(홍시)시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주님을 거절하고 쓸모 없이 말라버린 땡감이 간혹 있다는 것을 시사하진 것 같아 목사님과 저는 서로가 내가 바로 그 땡감이 아닐지 모르겠다며 회개하였습니다.
내일 모레면 성탄일입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츄리, 길거리의 광고,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노래, 그런 것 보다 저는 땡감을 변화시키지 못하신 예수님의 애통하셨을 것임을 대신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주님이 뜻하신 대로 변화되지 못한 나를 보시며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 금년 크리스마스는 홍시가 되지 못한 땡감 같은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바라보는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봤습니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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