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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쾌 장로

 

그의 청년시절은 세상에서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에 재학중인 그에게 주위에서는 장래 “노벨화학상감”이라는 얘기도 서슴지 않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필자도 그런 얘기를 동문회나 주변에서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붙들린 하나님의 종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신 이후 그의 삶은 “노벨화학상감”이라는 전도양양 했던 청년시절과는 달리 어려움과 고달픔과 시련의 길을 끝없이 걸으셨습니다.
지난 10일 저녁 오클랜드에 위치한 이스트베이 제일 침례교회 부근에는 자동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고  조용필 목사님의 추모예배가 엄수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설교자(조효훈목사)나 추모사를 전하시는 목회자(한택희목사, 신태환목사, 위성교목사)들이나 그분들에게서는 공통적인 표현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세상적인 수단을 모르시고 양들에게 기도해주시는 분이었다고 고 조용필목사를 그렇게 추모하셨습니다.
세상말로 난체 안하시고 조용히 목회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인내하시고 남의 좋은 점만을 얘기해주시는 분이었다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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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적으로 학문이나 지식이 크셨음에도 그것들을 절대 나타내시지도 않으셨고 오히려 약한것 만을 택하셨던 목회자였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바보(?)”였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고 조용필목사님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그가 명설교자였다거나 감동적인 말씀을 전하는 자였다거나 또는 단체장 장(長)자리를 맡아 헌신하셨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오직 어렵고 힘든 고난의 길을 걸으셨던 목회자이셨다는 얘기만 들렸습니다.
세상적인 수단을 모르시던 목회자….
필자에게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같은 교정을 드나들었던 선배님이시었습니다.
사무실을 찾아오시면 앉으시기도 전에 기도해주셨습니다. 힘내라고 어깨를 다독거려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선배님이 떠나신 것 입니다.
제가 미국에 오기 바로 전에 목회를 시작하시어 여지껏 비단길 아닌 자갈밭길만을 걸으셨던 선배님….
선배님의 설교가 감동적이 아니셨더라도 걸어가셨던 가시밭길 같던 힘들으셨을 고난의 길들이 간간 떠오릅니다.
힘드신 중에도 늘 기도해주시던 일, 아무리 고달프셔도 내색안하시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던 일.
“돈이 없는 자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추억이 없는 자가 가난한 자"라는 말이 있듯이 선배님에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추억들을 많이 남기신 진정 부유한 자이셨습니다.
선배님께서 그동안 어렵게 사셨던 그 삶 자체가 우리들에겐 설교였습니다.
평안하소서!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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