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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수 목사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


우리가 다 직시하는 것이겠지만, 오늘날 예배당에 모인 청중들은 목사의 설교보다는 TV 드라마나 각종 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를 더 신뢰하고 흥미있어 합니다.
설교의 위기를 언급할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성서 해석의 불성실입니다.
성서 텍스트가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해석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물론 강해설교 제목설교 같은 형태를 취해서 성서를 취급하여 설교를 하지만 신구약 66권에서 성서를 편집하듯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교는 성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성서를 해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이미 의도된 결과가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훼손시킬 위험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청중 수준의 해석과 적용을 넘어서지 못하게 됨으로써 점점 청중들의 기대치와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바흐의 파르티타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합시다. 연주자는 악보만 있으면 연주를 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악보를 지나 바흐의 음악 세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보 속으로 들어가 곡의 실제를 경험해야 합니다.
악보라는 기호는 단순히 어떤 소리를 지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근본적으로 음악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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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이 본문에 대한 해석인데, 이는 본문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지평 속으로 들어갔다고 다 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로 그것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융해되는 ‘지평융해(가다머)’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 텍스트의 해석은 휠덜린이나 괴테의 시, 렘브란트나 피카소의 그림, 모차르트의 음악을 해석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교자들이 지평융해의 능력을 갖기 위해 삶과 문화를 치열하게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대다수 설교자가 접하는 책은 해석능력을 배양하는 안내서가 아니라 이미 가공된 기술서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설교비평가인 정용섭 박사는 “오늘의 설교자는 5급 정도의 바둑 실력이면서도 프로 9단의 바둑을 해설하고 있는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세계는 저만치 있는데 그저 흉내만 내면서 성서를 해명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성서를 자기 목적에 맞게 이리저리 꾸미는데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꽃을 피우는 것은 석유가 아닙니다. 거친 땅에 평화의 캐비지를 심는 것은 주식이나 증권이 아닙니다.
마이더스의 손에 다시 인간의 피가 흐르게 하고 늑대가 사슴들의 호수를 흐리지 않게 하는 힘은 경제가 아닙니다. 생명의 에너지 ‘영성’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자의 에너지이며, 의로운 자의 힘입니다.
이 에너지가 송유관을 타고 흘러 각각의 영혼에게 불을 댕깁니다.
그 마음에 그 몸짓에 그 걸음걸이에 힘과 빛을 던지는 것입니다.
청중(교우)들이 우리의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감동하지 않는다고 슬퍼하기 전에 먼저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설교가 ‘지층융해’에 나아가지 못했음을 말입니다. 목사의 책 읽기는 문화와 세상을 읽고 지층융해의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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