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순호-01.jpg

글: 현순호 목사


6·25전쟁은 너무나도 잔인한 세계적인 비극이었다. 

우리 집 역시 잿더미로 변했고 사랑하는 동생을 폭격에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부모 형제 친구와는  소식이  끊어진채  여러해동안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전쟁은 내가 사는 자리와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내가 자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다.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에서 대한민국의 남단인 부산을 거쳐  악명 높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강금돼 있었으니... 

이전에는 자신의 노력이 성공의 열쇠라는 이념으로  세운 목표를 향해 죽자하고  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외부의 환경이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로 깨달았다. 

즉  99 %의 내 노력이 있어도 1%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있어야 완성된다는 진리다. 

나는  힘쓰는 자가 천국을 빼았는다는 성경말씀을 마음 깊이 새겼으나 지금은 다른 성구로 바꾸었다. 

즉 공중에 나는 새도  조물주의 허락이 없으면 계속 날아갈수가 없고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나는 신문기자가 되기를 원했고 또한 그 분야의 책도 많이 읽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주일교회에  갔다 오다가 길에서 납치되어 끌려간 것이 결국 인민군이 되었고 그곳에서 도망쳐서 국군에 귀순하자 곧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던 약속은 빗 나가고  몇년간 포로수용소 안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용단과 뱃장에 의해 자유인이 되어 오늘 까지 살수 있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노력 보다는  어떤 힘에 의해  이끌려온 점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의 어느 대통령이 어렸을 때  내일의 대통령 OOO 라고 책상위에 써 놓고 계속 그 길로 달려서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을듣고  많은 학생들이 그 분 처럼  노력했으나 다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니다. 

분명히 본인의 노력 이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다음은 무서움의 개념이 바뀌었다. 

어린 일제시대에는 순경이 제일 무서웠고, 학교에 가면서는 선생님이었고  직장에서는 상사였는데  6·25를 거치면서 새로 깨달은 것은 배고픔이 제일 무섭다는 것이었다. 

뱃 가죽이 등 뒤에 붙을 정도로 속이 비었을 때는 앉으나 서나 먹을 것 만 생각하게 되고 눈을 감으면  고기에 흰 쌀밥을 입이 찢어지도록 밀어넣는 꿈만 꾸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죽어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옆에  있는 동료가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내면 또 한사람이 가는구나, 나도 언젠가는  누구 하나  슬퍼하는 사람 없이 가겠구나  할 뿐이고, 관심이 있었다면 죽어가는 사람 머리맡에 있는 밥그릇이었다. 

누가 빨리 낚아채서 자기 입에 집어넣느냐 이다.  

몇일간 내던  신음소리가  멎으면 아직 온기가 있는 그 사람의 입고 있는 옷을 벗겨 자기 담요에 싸 놓았다가 다음 날 일하러 나가 피난민들에게 그 옷을 주고 주먹 밥 몇덩어리를 받아 들고 와서 남들이 자는 밤에 이불 속에서 혼자 먹는다.  

현순호.jpg

불란서에만 장발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배가 고픈 곳에는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삼일 굶으면  도둑질  하지 않는 놈이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맞는가보다. 

동정도 윤리도 종교도 배 부른 다음에 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지금 먹을 것이 넘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나의 고민은 필요한 분량 이상의 음식을 먹지않는 운동이다. 

그렇게 배 고픈 경험을 한 자신이 지금은 덜 먹기 운동을 하고 있으니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것이 있다면 나의 노력과 조물주의 도움이 더해질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배웠고  또 배 고픈 설움을 경험했기에 오늘날 어떤 음식이라도 달게 먹으며   매사에 감사하면서  조물주께 찬양을 드린다.

목회자컬럼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