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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정인 목사
<프리몬트 제일 장로교회>

 

언제가 친분이 있는 분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머문 그날이 그 집의 아들의 생일이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온 식구가 잠자리에 든 늦은 밤에 그의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우는 이유는 그날 생일을 맞이한 아들이 지능이 성숙하지 못한 아이이어서 마음이 아파서 운 것이다.
만 약 여러분의 자녀가 한참 뛰놀 나이에 걷지 못한다면, 10살이나 되었음에도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다면,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었지만 말을 못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자신이 모태 신앙을 자처하면서,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 하면서,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신앙이 자라지 못한 ‘영적 미성숙아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본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들을 보시고 우시지 않으실까?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점을 강조하시고 있다. 예수님은 비유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하셨다.
“땅에 씨를 뿌리면 처음에는 싹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충실한 곡식이라.”(막4:28)하셨다.
이 는 씨가 자라서 곡식이 되듯이 자라야 함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또 성경은 성도들을 향해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요일서 2:12-13) 하고 부르신다.   이렇게 부르신 것은 육신의 나이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 나이 곧 신앙성숙의 정도를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에서 구원의 도리를 말씀하시면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하시면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단계까지 성장해야 함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잔 웨슬리는 이를 ‘초기 구원’과 ‘구원의 완성’으로 구분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함을 강조했다.
사 도 바울은 자신을 ‘익은 열매’라고 자부심을 가졌는데(롬8:23) 우리는 지금 어떤가? 아직도 싹인가? 아니면 이삭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거두시기에 합당한 충실한 익은 곡식인가? (마13:30,계14:14,15)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가리켜 아비(벧전5:1,요한삼서1:1)라고 당당히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신앙의 연륜은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자라지 못한 성도를 향해 안타까워 말씀을 하신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고전3:2,히5:12), “신령한 생활을 하는 영적인 신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육적인 신자이구나. “(고전 3:3) “신앙생활을 오래하였기에 이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초보에 머물러 있구나.”(히5:13) 지금 내가 내 자신을 판단한다면 육적인 신자인가? 아니면 영적인 신자인가? 아니,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고 어떻게 평가를 하실까?
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을 실시한다.
그 훈련 내용을 보면 대동소위하게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초보들이다.(히6:1-2) 주님은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 갈 것을 명령하셨는데(히6:3) 교회에서는 약간의 이 훈련의 과정을 이수한 성도들에게 멋있는 사각모와 가운을 입히고 거창한 ‘제자의 명칭’을 안겨준다.
영적 어린애에게 어울리지 않는 꼴보견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어떤 성도들을 제자라고 하셨는가? 성숙한 성도이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께서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자가 바로 제자인 것이다.(요13: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 연단을 통과 한 후에 구원의 완성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하면서 머뭇머뭇했다.
아 니 아예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 끊임없이 외쳤다. 지금 우리 성도들이 그들과 같은 모습이 아닌지?  지금  자신이  어디에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세상 가운데 방황하고 머뭇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께서는 이렇게 성장하시기를 권면하심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지금으로 만족하오니.’ 하지 않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받아 놓은 구원인데 무엇을 더 바라리오.’ 하며 아예 주저앉아 세상과 짝지어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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