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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일 목사(한인기독교회)

지난 19일 LA 한인사회를 깜짝 놀라게 한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비즈니스의 렌트비 분쟁으로 건물주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한 충격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그 당사자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한인이요, 성실한 교인이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리우드 지역서 의류판매업소를 운영하던 박승철씨가 유대인 건물주인 마크 더글라스 베이어씨에게 총격을 가하고 본인도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지난 1년여에 걸친 렌트비 조정과정 중에 얻은 상처와 아픔 때문이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박씨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지인이나 단골 고객들은 한결 같이 박씨를 ‘성실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간 업소를 운영하면서 한 번도 렌트비를 밀리지 않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아왔다. 경제적 침체의 여파로 본인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종업원들에게는 그 짐을 지우지 않고 임금을 제때에 지불할 정도로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았다.
 
교회에서도 안수집사로서 봉사활동에도 앞장서서 일을 했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사시는 부모님을 수시로 찾아 뵐 만큼 효심도 남달랐다. 무엇보다도 지난 92년 LA폭동 때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황 속에서도 힘차게 재기했던 강인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실함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극단적인 일을 벌었다는 것은 그만큼 작금의 경제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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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일어난 렌트비 참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건물주와 세입자간의 렌트비 분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오늘내일 하는 업소가 많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장사가 안돼 고통을 호소하는 세입자들은 임대료라도 줄여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건물주들 역시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업소로부터 렌트비를 받아야 건물 페이먼트를 납부하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건물 안에 있는 한 두 업소가 문을 닫으면 건물주에게도 그만큼 재정적 부담은 커지게 마련이다.

경제지표는 나아진다고 하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더 무섭고 차가워지고 있다. 그나마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사람들이 막판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올라간 실업률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직업을 잃은 사람이 재취업을 한다는 것은 눈을 씻고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수 십군데 이력서를 넣어보았지만 단 한 군데서도 면접을 하자는 통보를 받은 것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도 많다.

장기간의 경기침체는 단순히 소비심리만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아량의 폭’도 위축시킨다. 내가 힘든 것만 생각하지 남이 힘든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신뢰는 깨지고 감정만 날카로워진다. 결국 쌓여진 감정은 언젠가 폭발하고 만다. 감정이 폭발하면 누가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다. 서로가 공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일찌감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경기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정부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 경기가 풀리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당장 오늘을 걱정하는 시민들의 고통이 커져만 갈 뿐이다.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그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다. 즐거움은 나누면 두 배가 되지만 아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고통도 서로 분담하면 그 강도가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다.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절박한지를 끝까지 듣고 조금만 양보해 주었다면 이런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격려를 통해서도 고통은 분담될 수 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말도 고통을 겪고 있을 때는 상처가 된다. 거절할 땐 한 마디로 자르기보다는 공감부터 표시하는 것이 순서이다. “오죽하면 저한테 이런 부탁을 하시겠습니까?” 부탁을 하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도 고통을 분담하는 길이다.

아르메니아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당신의 아픔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내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웃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다. 이웃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생각하고 그 고통을 분담해 주는 선한 교회,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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