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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희 사모


한국전쟁에 참여하였다가 1951년 2월11일, 중공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사망한 로이 해드 상사의 유골이 지난 6월3일에 돌아왔다.
참으로 길고 길었던 59년이라는 험한 세월의 다리를 건넌 귀향이었다.
로이 해드 상사는, 기록에 의하면 황해도의 중공군이 관리하던 수안형무소에서 1951년 4월30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로이 해드 상사의 유골은, 1993년 북측으로부터, 한국동란 중에 사망한 2,000여명의 미군들의 유골들을 넘겨받은 미군이, DNA를 통해 찾아낸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로이 해드 상사의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비록 그의 가족들을 전혀 알지 못했으나, 장례식에 참석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국인으로써 내 조국땅에서 피흘려 희생한 분과 그 가족에 대한 경의를 표함은 물론이요, 아들을 전쟁에 내보고 그 긴 세월을 기다림과 슬픔, 아픔과 고통을 겪었을 가족들에 대한 우리들의 무언의 감사였다.
우리는 장례예배에 참석하는 중에, 로이 해드 상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로이 해드 상사는 1922년 생으로 이차대전 때, 이미 독일에서 미 해군으로 활약하다가 제대하였다.
그는 제대 후에 결혼과 함께 대학 재학 중에 있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육군에 징집되어 투입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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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동안 아들을 기다리던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장례식에는 어머니가 아들의 전사소식을 전해듣고 절규하면서 썼던 글이 순서지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글 중에는“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 그는 비록‘포로병’이 되어 적진에서 죽어갔지만,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내 아들이 피를 흘리며 숨져가던 그 순간을!...용감했던 내 아들, 오늘 여기 청동훈장만이 무언의 영광과 슬픔, 고통의 절규를 안고 동토의 먼 나라를 기억하며 빛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대망을 품고 자라났던 소년, 이젠 가고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아들의 자랑스럽던 군복을 가슴에 안아봅니다. 나라를 향한 불타는 의무와 사명, 인류를 향한 자유의 소망을 안고, 아들은 당신과 나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덧 그를 잊어버렸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자랑스럽게 귀대하던 그 슬픔의 날을 절대 잊지 못합니다. 나는 기도합니다. 또 다시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면 난 내 아들을 멀리 멀리 숨겨 보낼것입니다“. (1954년, 어머니 매리 해드)
우리 부부는 장례예배 후, 로이 해드 상사의 남동생 내외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재혼하였다가 남편의 유해를 맞이하기 위해 돌아온, 할머니가 된 로이 해드 상사의 부인 앤과 함께 포옹을 나누며, 앙상한 뼈마디가 만져지는 그녀의 메마른 몸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전쟁의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누가 이들의 가슴을 이토록 짓밟아 피눈물 나게 만들었던가!
어느 누가 무고한 생명들을 희생 제물로 삼았단 말인가!
나의 가슴에 처음으로 모든 인류에 대한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간절한 간구가 노도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로이해드 상사는 내 속에 처음으로, 모든 인류가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야 만 될 한 형제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하는 거룩한 귀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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