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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목사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출전 성적이 국민들의 교양과 인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닐진대, 대망의 우승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요란법석을 떨면서 시끄럽게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월드컵 축구가 한창이다.
 매 4년마다 모여서 각자 자기 민족과 나라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몸을 던지는 멋진 경기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축구를 좋아한다.
특히 축구는 남학생들이 학창시절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군대 시절에는 공휴일이나 주일 오후, 청춘의 시간을 달래던 탈출구였다.
나의 세대는 축구경기를 즐겨했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라면, 우리들은 입시에 지친 피로와 두려움을 체육시간에 마음껏 풀었다.
축구 경기는 90분 동안 하는데, 우리 반과 옆반은 선생님들끼리 내기 축구시합을 하기도 했다.
이런 날은 자기“포지션”(위치)이란 그저 허울 좋은 이름뿐이다.
모두 공격하다가, 전원이 수비하는 식이었고, 그저 모두 다 공만 보고 무작정 뛰어 다니는 꼴이었다.
코피가 터져도 죽어라고 공만 보고 달려갔다. 약간의 상처나 피멍이나 부상은 핑계거리가 되지 못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진 요즈음, 사람들은 다소 비현실적인데서 행복과 희열을 찾으려 하고 있다.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월드컵 축구시합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축구를 잘하는 나라가 선진국에 속하는 것이 아니요, 세계의 리더답게 잘 사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월드컵 경기를 통해서 국가 간의 친선과 이해를 도모하고, 애국심으로 뭉쳐지는 순간을 바라보며, 또한 순수한 마음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스포츠 게임은 정도를 넘어서서 지나친 과열과 부작용을 낳게 된지가 오래되었다.
 인기와 명예를 한 몸에 지닌 스타들이 탄생하지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무참히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마약 중독에 빠진 마라도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월드컵 축구대회의 열풍 가운데 살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작정 거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대표팀 축구단의 출전 성적이 국민들의 교양과 인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닐진대, 대망의 우승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요란법석을 떨면서 시끄럽게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스포츠나 경연대회에서 출전자들은 경쟁적으로 경합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경기의 승리에만 몰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패배한 선수들이나 감독들에게는 거의 패가 망신과 같은 형벌들이 주어지고 만다.
세상 사람들은 일등을 누가 하느냐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어느 회사 광고에 등장한 말처럼, 세상은 일등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등이나 삼등만 해도 잘 한 것이지만, 사람들이 찾으려는 즐거움은 끝이 없다. 욕망의 끝은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 시대의 경쟁과 경기에 예민했다.
그래서 그는 마치 경주자들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남겼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4)
상을 받으려 위를 바라보고 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받을 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본 것은 로마 황제의 상이 아니었다.
열심히 좇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쉬지 않고 달려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으려 했다.
다투거나 싸우면서 혹은 남을 제치고 받으려는 경쟁의 상이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살다가 장렬하게 순교로 마무리하는 용맹한 전사가 받을 영적 면류관이었다.
그는 최후에 무대 위에 올라서서 전 인류와 세계인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으면서 위로부터 주시는 빛나는‘면류관’머리에 쓰게 된다.
그 영광스러운 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다.
여러분도, 나도, 이처럼 멋진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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