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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교수
(서울 장신대 신학과)

성경에는 언제나 한 사람 때문에 민족이 사는 역사 나타나
소수 통해서 다수가 변하도록 만드는 사랑의 실천 있어야

성경을 읽다 보면, 서로 다른 두 개의 하나님의 방법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노아적 방법이고 하나는 아브라함적 방법이다.

 지상에서 늘어나는 악의 문제를 푸는 노아적인 해결책은, 의로운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다시는 그러한 방법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준다.

이는 이러한 방법이 그렇게 주효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전적으로 악을 제거해도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배반하려고 힘을 모아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모습은 노아적 방법의 무용함을 드러낸다. 

모든 사람을 홍수로 쓸어버린다고 해서 악이 멈추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적 방법이라 부를 수 있어 이를 소개한다. 

노아적 방법이 폭력적이었다면, 아브라함적 방법은 평화적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적 방법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학살하며 의로운 사람 하나를 보호하는 대신, 아브라함적 방법은 의로운 한 사람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소수를 위해서 다수를 멸절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로서 다수를 변하게 한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이야기는 언제나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연결된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을 바뀌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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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흉포함에도, 하나님은 세상 전체를 쓸어버리는 대신,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을 변하게 했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다.

인간이 지은 죄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노아적 방법인 듯하다.

‘나’만 빼고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넘쳐난다. 때로는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지 갑갑할 때도 있다. 

그러한 희생이 ‘나’에게 요구되었을 때는, 더욱이 그러하다. 

그러나 폭력이나 미움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내놓는 희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하나님에게 이끄는 것, 그것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임은 분명하다. 

소수를 위해서 다수를 멸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로 다수를 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이 어떠한 모양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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