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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삼 목사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18:4)질그릇은 모양도 없고 깨어지기도 쉬울 뿐 귀히 쓰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고후4:7)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이 보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말입니다. 썩을 육체 흙으로 빚은 인간이 그 보배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질그릇이며 그 속에 담겨있는 보배로 그의 믿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질그릇보다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보배를 보아야합니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마음씨가 나쁘면 어찌 백년을 해로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고급으로 잘 만들어진 그릇이라도 그 속에 썩은 것이 있다면 그 누가 쳐다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져야만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의 기질과 성격과 환경이 있기에 나의 성질을 변화시키려고 애쓰지마는 완전히 개조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보배를 가졌으면 그 질그릇을 잘 닦고 윤을 내려고 하지만 질그릇뿐입니다. 그러나 보배가 그 질그릇에 담겨 있다면 그 질그릇을 더러운 곳에 두어둘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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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보관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것은 질그릇이 잘나서가 아니라 보배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보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더러운 죄악 세계 속에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기도와 성경말씀으로 잘 닦아서 향기를 나타내야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근본적인 모순을 품은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역설은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모순 같지만 진리입니다.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이것이 기독교인의 역설입니다.
여기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술을 줍니다. 그는 술을 드는 동안에는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술이 깨면 또 술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실한 기독교인이 자살하고자하는 사람에게 한번만 주님 앞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그리고 자살해도 늦지 않을 터이니 그렇게 하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 무릎을 꿇고 인생의 허무함을 입 속으로 중얼중얼 마치 유언을 하듯이 외었습니다. 그랬더니 웬일인지 마음이 편해지고 다시 한번 살 의욕이 나서 그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새 출발을 하고 성공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역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너무 보배에만 치중하다 질그릇을 만나면 온통 모든 것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로 목사들의 보배만 보다가 그들의 질그릇을 발견하게 되면 아니 저 사람이 장로야 목사야 하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그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그릇을 무효화시키거나 질그릇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보배를 넣으신다는 것입니다. 보배가 발견되는 곳은 언제나 질그릇 속에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마다 그에게서 질그릇의 흔적마저도 보지 말았으면 하고 희망을 합니다.
특히 목사들에게서는 인간의 냄새도 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질그릇은 발견되며 인간의 냄새는 풍겨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질그릇만 보고 실망하지 말고 그 안에 있는 보배를 보아야 합니다. 보배가 크면 클수록 가치 있으면 가치 있을수록 질그릇은 가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예수 열심히 믿고 싶은데 의심이 생깁니까? 그것으로 고통하십니까? 그리고선 나는 믿음이 없는가보다 의심하십니까? 우리가 질그릇임을 알게 되면 어쩌면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믿음은 의심 때문에 말살되지 않으며 참된 믿음의 보배는 의심하는 질그릇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연약함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요 또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기독교는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질그릇을 깨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 질그릇 속에서 나타내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보배로 채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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