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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삼 목사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예복인 에봇을 가슴에 두른 옷을 입었습니다.
에봇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보석이 달려 있었고 그 보석에는 각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사랑으로 자기 가슴에 안았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으로 가장 깊은 사귐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위해 서로 기도하는 것일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말합니다(빌1:3-4) 교제라는 말은 친교, 사귐, 어울림, 참여, 함께한다,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교를 나뉘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취미가 같다든지 나이가 비슷하다든지 고향이 같은 지역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교제란 하나의 우정이며 서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제라는 말은 너무도 모호한 말이 되어서 그것이 이 단어가 이전에 의미하였던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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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라고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동지애 또는 좋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제란 마음속에 영생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협력한다는 뜻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의지하지 않는다면 천국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신앙이 확고하지 않으면 복음에서 교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친교 안으로 사로잡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복음에서 교제가 없다고 하면 단지 아는 것 우정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다가도 서로 갈라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에 참여한 것을 인하여 감사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수준을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들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교회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보다 교회에 출석하는 일보다 기독교의 교제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육신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영적으로 십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기뻐하는 근본의 하나는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친교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수 십리 떨어져 있는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바울은 기뻤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기쁨으로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노라.
이 이상 더 두터운 교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울은 감옥에 있는 신세이면서도 남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합니다. 재판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믿음의 동료들을 마음에 떠 올려 봅니다.
회상되는 일마다 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생각해봅시다.
목사가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넘치는 교인인가? 아니 주님이 나를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넘칠 것인지 나는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크리스챤인가 하고 말입니다.
아이고 나는 교회 다니는 친척하고 일하기보다는 구원받지 않는 이웃과 함께 지내는 편이 더 났습니다.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져야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괴로울 때 도와주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오래전 어느 방송국에서 결혼한 지 5년 된 카플 세 쌍을 모아놓고 게임을 합니다. 자 문제를 들이겠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저지른 잘못을 몇 가지 말해 보세요. A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하자 모두 웃었습니다.
B도 지지 않으려고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모두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이제 C의 차례입니다 그런데 C는 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아나운서가 아니 5년 동안 무슨 일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C는 물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사실 나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다 잊어버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데 우리는 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싸우기 시작하면 쾌쾌묵은 고리짝 옛날 것들이 다 나옵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고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서로 교제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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