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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배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다시 태어나는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무의미

이 땅에서는 회개로만 부활을 소유할 수 있어

 

신앙생활의 속성에는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권주의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 종교개혁 이후에, 성경을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계몽주의 관점이 등장하자 부활 신앙이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독일 신학자 볼트만(Rudolf Karl Bultmann, 1884~1976년)이 끼친 영향이 신학계를 태풍처럼 덮쳤습니다.


볼트만은 사람이 부활한 역사적인 선례가 없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학적인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부활은 단지 초대 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극복하려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사용했다고 설파했습니다.


이 주장에 현혹한 후학들은 성경에서 초월적이며 신비적인 요소들을 벗겨 내는 시도를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양파 껍질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 내듯 무엇인가를 찾으려 시도하지만 결국 양파만 버리게 되듯이,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는 시도만 했을 뿐입니다.


부활을 논리와 과학적 인과관계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을 초월하는, 이성을 초월하는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만큼 불쌍한 존재가 없습니다(고전15:19).


부활은 우리의 생활과 사고를 초월하는 축복이며, 신비의 절정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생명의 연합입니다.
예수 자신이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11:25~26).


부활의 신비가 믿어지고, 부활이 바로 내 몫이 되려면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축복의 통로로서 부활이라는 초월적이며 신비스러운 세계에 들어가게 합니다.
회개는 영혼의 방향을 재설정하게 하고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삶의 길을 걷다가 방향 전환을 10도, 30도, 90도만 하지 않고 180도로 완전히 전환하게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본질의 변화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서 그 길을 예비하던 침례 요한이 먼저 선포했습니다(마1:2).
예수께서도 회개를 선포하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막1:1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베드로도 복음 선포를 회개의 선포로 시작했습니다(행2:38).
예수의 앞길을 예비하던 침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예수께 사명을 부여받은 베드로도 한결같이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회개는 복음의 알파와 오메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시작과 끝이며, 이 선포에 대한 반응이 뜨거운 눈물과 회개로 정점을 이룹니다.


그래서 회개는 부활을 통해 천국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됨의 시작이며, 그리스도인 됨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보증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고하며 이 땅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과,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최종 목표지점을 지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천국과 예수가 재림하심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으며, 부활 신앙은 미래의 천국을 오늘 체험하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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