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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현순호 목사



고향에서 푸대접 받으신 예수님
(눅4:16-30)



백번 들어도 싫지 않은 고향이라는 말, 그  곳에는 자신의 모든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 생기면 코 흘리개 동무들에게 알리고 싶고 어려운 일 당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벗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침에 신나게 둥지를 떠난 새가  해가 질 때는 지쳐서 제 둥지로 돌아오듯 사람들도 마음이 허전해지면 어머니 품같은 고향이 그리워지나보다.


 예수님은  타향에서 일하시다가 고향에 가고 싶었다. 


가난한 목수 아버지를 도와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아 주었는데, 지금 사는 모습도 보고싶고 가난해도 마음 만은  넉넉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꿈을 키우던 벗들, 주변의  산천 초목들, 오래간만에 보니 감개무량할수 밖에... 


마침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 이사야서 61:1절 이하를  읽고 그 내용을 설명하게 되었다. 


약 7백년 전에 예언 한 이사야의 말이 오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오신다고 한 메시야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잘 사는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설명하자 이 폭탄같은 선언을 듣고 있던 고향사람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우리가 잘 아는 예수가 언제 이처럼 성경을 통달했고, 그것을 조리있게 전달하는 능력에 감탄하며  은혜를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이 생겼다. 


예수 자신이  메시야가 된다는 말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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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어버지는 목수인 요셉이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 마리아이며 예수에게는  4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는 우리가 잘 아는 이웃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메시야가 될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예수를 동네에서 쫓아내자는 의견 보다는 아예 죽이자고 하는 의견으로 기우러져 그를  산 낭떨어에서 밀쳐 내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곳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눅4:16-30)


 더 안타까운 일은 예수님의  친동생들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를 않았다. 


그리고는 집을 떠나라고 밀어낸다.(요7:1-5) 

그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분의 심정이 기록되어있다.


 “보라  선지자 중에 자기 고향에서 대접받은 이가 어디 있느냐? 없다” 고 하시며 그 실례로 그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도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사렙다(서해안 시돈 남방)에 사는 한 과부의 도움을 받았고 또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외국인 수리아의 국방장관인 나아만 만이 고침을 받지 않았느냐! (눅4:24-30 ) 


즉 어려울 때 같은 고향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지방 사람보더 도움을 더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가지는 말고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로는 보고 싶은 얼굴들, 희비애락이 숨어있는 고향, 정감이 가는 산천 초목들,  학교, 교회당 , 코흘리개 친구들 사람되라고 횃초리 들었던 선생님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나도 고향이 그리워  50여년 만에  힘들게  내 고향 황해도 안악군의 심심 산골을 찾아갔다. 


그런데 너무도 실망했다. 


기억에 있는 산 천은 큰 변함이 없으나 언덕위의 교회는 흔적도 없고 더욱  내가 아는 사람이나 또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때 그 건물과 운동장이 그대로 있고 그 때 매달리던 철봉대도 재래식 화장실도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카메라를 멘 나를 따라 다니는 후배들, 어린애 들의 몸에서는 가난이 묻어날 뿐이다. 

마치 지나가다 들린 한 마을 같이 애틋한 정감이 없었다. 


차라리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간직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옛 애인을 늘 그리워 하는 바보 보다는 현재의 아내를 하늘 처럼 사랑하는 것이  지헤롭듯이 꿈속의 고향 보다는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 멋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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