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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랄리벨라 암굴교회를 대표하는 성 조지교회. 아름다운 십자가 모양 지붕이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다. 왼쪽은 교회를 옆에서 내려다본 모습. 바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15m 깎아 내려간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질문으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매우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향품과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솔로몬 왕이 스바 여왕이 가져온 대로 답례하고 그 외에 또 그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모두 주니 이에 그가 그의 신하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더라.”(대하 9:1∼12)

솔로몬 왕과 시바(Sheba·성경에는 스바로 표기) 여왕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아프리카 동쪽 나라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3000년 전 솔로몬 왕과 사랑에 빠졌던 여왕이 귀환 후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에 오른 메넬리크 1세라는 것이다.




시바 여왕, 솔로몬, 

그리고 언약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북쪽으로 960㎞ 떨어진 소도시 악숨은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종교,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이곳은 솔로몬 왕에게 선물한 금만 4t(120달란트)에 이른다고 했을 만큼 부국을 일궜던 시바 여왕의 고향이자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일대를 호령했다는 메넬리크 1세가 악숨 왕국을 일으킨 수도이다.


악숨을 둘러싼 전설의 정점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담은 모세의 언약궤가 이곳에 있다는 주장이다. 


에티오피아 역사서 ‘케브라 나가스트’에 따르면 장성한 메넬리크는 아버지를 찾아 예루살렘에 가 3년을 머물렀고, 솔로몬 왕은 악숨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위해 12지파에서 성직자와 학자 등 각 1000명씩 뽑아 동행시켰는데, 이때 언약궤를 함께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언약궤는 아프리카 최초 교회로 불리는 악숨의 ‘성모 마리아 시온교회’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약궤가 공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약궤를 볼 수 있는 사람도 언약궤를 지키는 수도사 한 사람뿐. 


그는 죽을 때까지 성소 밖으로 나올 수 없고, 그 외에는 아무도 언약궤가 있는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다.



악숨, 역사와 전설 사이


지난달 29일 마침 주일날 아침에 성모 마리아 시온교회를 찾았다. 


새벽부터 예배를 드리러 교회를 찾은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 수천명이 두른 전통의상 ‘셰마’로 교회 앞 광장이 흰색 물결을 이루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이날 예배를 취재하던 현지 기자 페세하 메제베(39)씨에게 슬쩍 언약궤 이야기를 꺼냈다. “메넬리크 1세는 솔로몬의 왕국을 아프리카에서 계승한 후계자이고, 우리는 그의 후손”이라며 “인구 6만명이 모두 정교회 신자인 성도(聖都) 악숨이 언약궤를 모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귀하다는 것일까.


악숨에 남아있는 시바 여왕의 궁전 터와 목욕탕 역시 애석하게도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엇갈린다.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건축 연대는 7∼8세기로, 여왕이 살았던 기원전 10세기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인들에게 굳이 역사적인 잣대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과거와 현재, 전설과 역사를 넘나드는 시바 여왕의 이야기는 옛 영광을 재현하고픈 이들의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허리가 동강난 

오벨리스크


성모 마리아 시온교회 앞의 큰 광장을 지나면 거대한 비석들이 서있는 오벨리스크 공원이 나온다. 

우뚝한 오벨리스크들 중 가장 큰 것은 1937년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세 동강을 내 로마에 옮겨 세웠던 것을 돌려받아 200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앞에는 여러 조각이 난 채 누워 있는 더 큰 오벨리스크가 있다. 


높이 33m에 무게 50t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돌기둥이 마치 찬란했던 왕국에서 최빈국으로 무너진 에티오피아 모습을 보는 듯해 애잔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악숨에는 총 1200여개의 오벨리스크가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동강난 것까지 포함해 현재 땅 위에 있는 것들은 60여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며 땅 속에 잠들어 있다는 것.


현지 유적지 중 가장 큰 고대건물인 타아카 마리암 왕궁을 발굴한 고세진 박사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직접 발굴하기에는 기술과 자본이 부족하고, 서구학자들에게 맡기자니 성과물을 자국으로 가져가버려 반감이 크다”고 했다.


한때 로마, 페르시아, 중국 한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4대 제국으로 불렸다는 악숨 왕국. 

그 모습을 지금의 작은 농촌 도시 악숨에서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아직 유적의 5%도 채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니, 시바 여왕과 악숨 왕국의 영광의 빈자리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은 순례객의 상상력의 몫이었다.




천사들이 함께 만든 곳, 

랄리벨라


악숨이 전설과 역사가 뒤엉킨 곳이라면 악숨에서 남쪽으로 400㎞ 떨어진 랄리벨라는 에티오피아인들의 신앙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랄리벨라는 해발 3000m 고지대에 자리 잡은 11개의 암굴 교회로 유명하다. 


놀라운 것은 밑에서 위로 교회를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바위산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깎고 파서 만들었다는 점이다. 


작업을 위해 먼저 주변부터 깎아내 좁고 깊은 길을 내고, 교회 문을 만든 뒤 바위 속을 파고 들어가 예배실을 만든 것이다. 


이슬람이 세계에 위력을 떨치던 12세기, 이슬람의 압박으로 예루살렘까지 성지순례가 어려워지자 독실했던 랄리벨라 왕은 자신의 땅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전설에는 왕이 암살 시도로 사흘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천국에서 암굴교회의 환상을 보았다고도 한다. 


굳이 땅 밑으로 암굴교회를 만든 것은 이슬람을 피하기 위해 바로 위에서 내려보지 않는 한 쉽게 눈에 띄지 않고, 공격에 화재로 소실될 위험이 없게 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암굴교회는 120여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에티오피아인들은 인부들이 하루치 작업을 끝내면 밤마다 천사들이 내려와 일을 거들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완성하기 힘들었을 대역사(大役事)라는 뜻이리라.




신앙으로 빚은 기적


교회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구세주교회’는 가로 22m, 세로 33m, 깊이 11m 규모로 단일 암석으로 만든 교회 중 세계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교회 주변 암벽에는 어른이 기어서 들어가기에도 좁은 작은 구멍들이 여러 개 나 있는데, 성직자들이 들어가서 기도하던 곳이라고 한다. 


편하게 드리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라는 의미로 최근까지 사용했지만 관광객이 몰리면서 기도가 불가능해져 더 이상 쓰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교회는 제일 마지막에 세워진 성 조지교회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교회 지붕에 3개의 십자가가 겹겹이 조각돼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형 교회로 꼽힌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이 교회는 노아의 방주를 상징하는데, 건물을 3층으로 구분해 물 밑에 잠긴 1층과 2층에는 창을 내지 않고 3층에만 창문을 만들었다.


교회들을 연결하는 미로 같은 신비한 지하 터널, 다윗의 별 등 다양한 문양을 기둥과 천장에 정성스럽게 새겨 넣은 성모 마리아교회의 정교함…. 


감탄을 자아내는 암굴교회의 불가사의함은 이곳이 신실한 믿음으로 지어진 곳임을 수긍하게 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처럼 교회 문턱을 넘기 위해 신발을 벗을 때는 신앙이 없는 이들조차 절로 숨을 죽이게 만드는 경건함이 압도한다.

16세기에 랄리벨라를 최초로 방문한 유럽인인 포르투갈 수도사 프란시스코 알바레스는 “이곳 암굴교회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믿지 않을 테니까”라고 썼다. 부족한 글 대신 감동을 전할 사진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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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숨의 성모 마리아 시온교회 주일예배에서 양과 염소가죽으로 만든 전통악기를 두드리며 찬송하는 정교회 소년들.



■ 기독교 신앙 지켜온 

에티오피아 


커피의 발상지, 한국전쟁 때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해준 나라…. 

에티오피아 하면 이런 정보가 먼저 떠오른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드물게 19∼20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을 이겨내고 독립을 지킨 나라이며, 한자를 제외하면 암하릭어라는 현재 사용되는 문자 중 가장 오래된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찍 신앙을 받아들여 341년에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세워졌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슬람이 아프리카에서 급속히 세력을 키울 때에도 에티오피아는 신앙적으로 고립된 섬처럼 남아 기독교를 지켜왔다.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지역마다 운영하는 교회학교가 1900년까지 에티오피아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을 정도로 기독교는 에티오피아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유대교의 영향으로 레위기에서 부정한 음식으로 말한 돼지고기와 오징어, 조개류, 갑각류 등을 먹지 않는다. 


금식에도 엄격해 1주일에 수요일과 금요일 이틀, 부활절 이전 55일간 등을 포함해 1년에 230일 정도를 육류와 달걀, 우유, 치즈 같은 유제품을 금한다.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회와 더불어 크리스마스를 1월 7일로 정해 축하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며 공생애를 시작한 주현절을 '팀카트'라 부르며 1월 19일부터 3일간 축제를 벌인다. 


달력도 1년을 13개월로 나누는 정교회식 율리우스력을 따르기 때문에 2016년 6월 11일인 오늘이 에티오피아에서는 2008년 10월 4일이 된다.


2007년 에티오피아 인구 통계에는 정교회가 43.5%, 이슬람 33.9%, 개신교 18.6%로 집계됐지만 그동안 이슬람이 급성장해 정교회를 앞질렀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몇 년간 이슬람의 공격으로 서부 지역 교회 몇 곳이 불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글, 사진  권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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