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 실천하는 두 목회자

예수님께 받은 크나큰 사랑과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두 목회자가 먼 길을 나섰다.
박윤식(57) 선교사는 10년 전 태국의 라후 부족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7일 출국했다.
40여 년 전 총을 들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증권단선교회
김원철(64) 지도목사는 다음달 성경을 들고 베트남을 찾는다.
두 목회자는 “복음을 영접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한껏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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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국으로 떠난 박윤식, 이명순 선교사 부부가 16일 서울 용산역에서 기쁨의 웃음을 짓고 있다.

 

박 선교사는 1989년 당시 부목사로 있던 부산 수정동교회(조관호 목사)에서 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라후 부족을 위해 헌신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북쪽으로 200여㎞ 떨어진 산마을 매아이가 그의 선교기지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 국경이 접하고 있는 골든 트라이앵글에 위치해 있다.
88년 선교여행차 이곳에 들렀을 때, 의료·교육의 혜택을 못 받고 어렵게 살아가는 라후 부족을 보면서 그는 젊은 시절의 다짐을 새삼 떠올렸다고 한다.
“군대에서 다리를 다쳐 입원치료 중인데, 주변에 발목이나 손가락 등이 잘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사랑의 사람이 되어 상처 입은 이들을 도와주자’고 결심했지요. 사랑의 사람에 어울리는 모습이 바로 선교사였습니다.”
‘라후부족선교회’를 세우고 90년부터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매아이선교센터와 신학교를 세우고 젊은 인재들을 키워내는 데 집중했다.
1년에 두세 차례 한국의 성도들이 보내주는 쌀과 의복을 전달하는 구제사역을 하고, 한국과 미국 의료진의 협조로 라후 부족의 큰 문제인 마약을 치료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특히 매아이선교센터를 건립할 땐 재정 압박이 심해 갈등하기도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네 자녀들을 가르치는 비용을 나한테 맡기면 자녀들은 내가 책임지겠다’라고요.”
박 선교사는 당시 치앙마이에서 있던 세 자녀의 학비를 모두 드리겠다고 선언했다.
여명순(55) 사모는 “하나님께서 남편의 그런 결단을 예쁘게 보셨다”며 “재정의 길이 열려 선교센터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고, 자녀들은 미국에 사는 고모가 데려가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고 말했다.
마을에 교회도 개척하고 사역의 범위도 넓어지자 후배 선교사들과 함께 동역했다.
박 선교사는 “그러나 내가 선교지에 버티고 있으니 후배들이 더 잘 할 수 있는데도 자립을 못하는 것 같았다”며 “그들에게 사역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떠날 결심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라후부족선교회 대표 자리도 가장 늦게 선교지에 합류한 ‘막내 선교사’에게 넘겼다.
하지만 라후 부족은 어머니처럼 믿고 따라온 박 선교사 부부가 떠난다고 하자 만류했다. 박 선교사는 그들에게 “10년 뒤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수정동교회로 돌아와 6년간 담임으로 시무했다. 1918년 설립된 수정동교회는 영남권을 대표하는 성결교회로, 1000여명의 장년들이 출석하고 있다.
선교사가 아닌, 선교지를 후원하는 교회 담임목사로 3년 전 라후 부족을 방문했다.
박 선교사가 언제쯤 돌아오는지를 손꼽아 기다리는 부족 사람들을 보면서 비로소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왜 안정적인 목회지를 떠나려고 하느냐?’란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기자도 그렇게 질문했다.
박 선교사의 답은 단순하지만 명쾌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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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음달 베트남 선교를 떠나는 김원철 증권단선교회 목사. 지난 여름 장애인들과 물놀이 갔을 때 모습.

 

▶ 33년간 직장선교를 위해 헌신해 온 김원철(64·한빛교회 협동·사진) 증권단선교회 목사가 내달 14일 서울 여의도 한국증권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은퇴 감사예배를 드리고 베트남 선교지로 떠난다.
이날 예배에는 증권업계 기독신우회 회원들이 대거 참석, 김 목사의 ‘증권 선교 30년’을 회고하고 향후 베트남 선교 인생을 격려한다.
“공채 2기로 금융투자협회(전 증권업협회)에 입사, 25년 동안 ‘증권맨’으로 살았죠. 1998년 증권연수원 본부장을 끝으로 퇴사했지만 목사로 변신, 증권단선교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장애우 겨울나기를 위해 매년 자선음악회를 열고 여름이면 물놀이를 함께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식당일, 신문배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이를 악물고 공부해 상고를 졸업한 뒤 73년 증권업협회에 입사했고 증권시황 방송 아나운서를 하면서 야간으로 방송통신대와 서강대 경영대학원, 한신대 사회복지실천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러나 마지막 길은 신학을 택했고 2001년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의 인생으로 목회자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 직장선교 활성화를 위한 신우회의 교육개발 연구’로 우리나라 직장선교 관련 박사 1호로 기록됐다.
환갑이 출쩍 넘은 나이에 베트남으로 자비량 선교를 떠나는 이유를 그는 드라마 같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로 대신했다.
“1969~70년 백마부대 소총소대 분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군인이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었죠.
그래서 매일 아침 작전을 나가기 전 지하 벙커에서 분대원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분대원 9명 모두를 1년 동안 무사히 지켜 주시면 훗날 목사가 되어 다시 이곳에 와 베트남 선교를 하겠다는 서원기도였습니다.
참전 몇 달 후 한 첨병 분대원이 10m 앞에 다가온 베트콩 한 명을 사살했습니다.
그 공로로 분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과 무공포장이란 영예를 받았지만, 머리에 총알을 맞아 처참하게 죽어가는 베트콩을 바라보며 인생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1년 뒤 그는 전우들과 함께 무사히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증권업협회에 근무하면서 신학을 공부, 목사가 됐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난 6월엔 고려대에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 베트남 땅에서 한글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했다.
“40년 전에는 총을 들고 베트남을 찾았으나, 이제는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한글을 들고 베트남을 찾는 셈이죠. 아직도 당시 치열한 전투와 죽어가는 베트콩의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앞으로 남은 여생을 베트남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 베트남 땅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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