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jpg

▲  비라카미사랑의선교회 본부장 장요나 선교사가 지난 9일 베트남 동나이성 비라카미한인연합교회에서 선교 보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장 선교사가 지난 5월 경기도 용인 남서울비전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치유 기도를 하는 모습. 비라카미사랑의선교회 제공



비라카미사랑의선교회 본부장 장요나(76) 선교사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선교사로 파송받은 그는 1990년 1월 23일 가방 두 개에 옷 두 벌, 미화 1300달러를 가지고 베트남에 도착했다.


호텔 앞에서는 구개열(언청이) 걸인들이 떼를 지어 “원 달러! 원 달러!”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불쌍한 생각에 빵 한 조각을 주고 안수기도하다가 공안에 체포됐다.


“그들에게 빵을 주는 것뿐 아니라 복음을 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천추의 한(恨)이 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음식을 넘기기도 힘들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지금도 예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베트남 영혼들을 생각하면 제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지난 9일 비라카미사랑의선교회가 ‘베트남 선교 30주년 기념대회’ 선교지 탐방을 시작한 호찌민의 한 호텔에서 장 선교사를 만났다.


장 선교사는 나흘간 진행된 탐방에서 간증하다가 처음 만났던 걸인을 생각하며 수차례 흐느꼈다.
모태신앙인이었던 그는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난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980년대 중반까지 대기업 기획실장으로 일했고 이후 건설회사와 광고회사를 경영하다가 쓰러진 것이다.


몸이 굳어진 그는 10개월간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났다.
이때가 그의 인생 하프타임이었다.


후반기 삶은 하나님을 위한 인생으로 탈바꿈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인데 코마 상태에서 천국과 지옥을 봤습니다. 지옥으로 가던 저를 발견하고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외쳤지요.

그러고는 ‘너는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요나처럼 선포하라’는 음성을 들었어요. 그러면서 ‘비라카미’(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지역을 맡겨주신다고 했어요.”


작은 부활을 경험한 그에게 복음 전파는 사명과 같았다.


아내와 두 아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홀로 베트남으로 떠났다.


혹자는 그가 처자식을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거역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공산권 국가에 가족 모두를 데려갔다면 선교에 집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대가가 따르는 일이었다.


무너진 교회 처소를 찾아 사진을 찍다가, 소수부족 가정에 쌀을 전달하고 나오다가 체포당했다.
또 교회를 세우고 설교한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등 6차례나 구치소에 수감됐다.


장 선교사는 “만약 제가 처자식이 보는 앞에서 공안에 끌려갔다면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아픔 때문에 선교가 더 힘들었을 것”이라며 회고했다.


가족은 그에게 든든한 기도의 후원자다.


큰아들 장훈씨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감독이고, 둘째 아들 장지훈씨는 아버지를 이어 선교사가 됐다.


오랜 감옥생활로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난치병을 얻었고 한쪽 눈까지 실명됐다.
하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오직 주님 은혜입니다. 선교의 열매를 창대하게 맺게 하셨습니다.”


장 선교사는 270여개의 교회와 16개 병원, 2개의 초등학교를 건축했으며 비라카미신학교를 통해 매년 60여명의 현지인 사역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의 선교사역에 한국교회와 미국 한인교회들이 협력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장 선교사는 날마다 침대 대신 자신의 나무관 위에서 죽음을 연습한다고 했다.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사도바울처럼 오직 영혼 구원이라는 사명에 묶여 살고 있다.
베트남의 ‘언더우드’로 불리는 이유다.

선교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