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아시아교회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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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봉 목사


인류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이 세상에 강림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들을 택하시고, “이방인의 길로 가지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도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일본어 성경에는 “멸망받은 양”에게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념으로서의 “잃어버린 양”이라던가, “멸망받은 양”은 앗수르에 포로되었다가 사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분산되었거나,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지와 주변국가들에 잔류하였거나, 무역이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아시아지역에 남아 있었던 디아스포라(Diaspora)인 동유대인(East Jews)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메시야의 강림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들에게는 아시아선교를 명하셨고, 부활한 후에 사도 바울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셨는데, 그에게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행16:6)하였고, 마게도냐 사람의 부름(Macedonian Call)을 받고 유럽선교를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의 일본어 성경의 마가복음의 추가문에는 예수님의 사도들에 의하여 구원의 복음이 동쪽끝과 서쪽끝까지 전파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사적으로 초기 아시아교회 대표로 추앙받았던 사도 도마가 동쪽의 끝인 인도와 중국의 끝까지 선교하였고, 사도 바울에 의하여 서쪽의 끝인 스페인까지 선교하신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AD30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인류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셨고, AD32년에 예수님의 사도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위하여 제비를 뽑아 선교지를 결정하였는데 사도 도마는 도마자신도 싫어하였던 인도가 뽑혀서, AD 32년에 후에 아시아교회의 본부가 되었던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에뎃사(Edessa, Armenia-지금의 터-키 중남부의 Sunliurfa)로 부터 유부라테스강을 따라 선교하면서 인도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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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연구의 에리스 마류 박사


도마행전(The Acts of Thomas)에 의하면 초기 인도 선교는 행전의 1-61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AD32-48년에 북부인도의 히마라야 산록을 따라 지금의 인도 동북부의 므낫세지파의 일족들이 살고있는 미조람(Mizoram)에서 선교하였고, 후에 마레이의 마랏카를 경유하여 중국의 끝까지 선교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이나 일본에 국가 형성이 되기 전 이였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적인 개념으로서는 중국을 말할 때에 이 나라들도 포함되어 말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우연히 옛날 가야연맹의 서북단에 있는 영주시 근처의 평은면 왕유리에서 사도 도마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증거로서 석상의 오른쪽에 우리나라에는 있을수 없는 4자의 히브리어 문자가 있는데 그 문자의 내용이 도마행전 104장의 “도마는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것과 같이 해석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가야의 김수로왕이 AD42년에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김해에서 6명의 왕들과 함께 가야연맹국가를 세울 때에, 누군가가 그곳에 와서 백성들에게 계욕(죄씻는 침례식)을 행하였고, 잔치(성찬식)를 집행하였고 왕들의 취임식을 주제하였다고,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6년후에 인도 북부의 아유타왕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이 김해에 와서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은 북부인도와 중국의 끝인 가야까지 다녀갔던 사도 도마의 역사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AD 48년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별세로 사도들이 모였다가, AD50년에 예루살렘사도회의를 가졌습니다.
사도 도마는 AD52년에 2차 인도선교여행을 시작하여, 이번에는 남부인도를 선교하면서 다시 중국으로 다녀왔다고 합니다.
남부인도에서는 7개 교회들과 두 분의 주교들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 교회들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AD72년에는 현지의 왕의 명령에 의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사도 도마가 숨어서 기도하였던 동굴과 순교지와 묘지자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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