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출신 목회자 2인 13년 만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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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재 다메섹교회 목사(왼쪽)와 유희관 대구 에스더국제사명자기도원 원목은 교도소 안에서 예수를 영접함으로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했다.


“정 목사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목사님! 반갑습니다.
저는 청송교도소에서 성가대로 같이 활동했던 유희관이라고 합니다.” “아… 형제님. 기억납니다.”
복음은 전인격, 삶을 송두리 채 변화시킨다. 탈북자가 남한 땅을 밟자마자 불안과 초초의 상태에서 자유인이 되듯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죄인은 죄에서 해방돼 새사람이 된다.
그것은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나 지존파와 같은 사형수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정광재(41) 다메섹교회 목사는 구정을 앞둔 지난 19일 전화한통을 받았다.
유희관(52) 대구 에스더국제사명자기도원 원목의 전화였다. 재소자가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교도소 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0.1%의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만남은 30일 고양시 주엽동 다메섹교회에서 이뤄졌다. 꼭 13년 만이다.
두 사람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교도소를 집 드나들 듯 했다.
정 목사는 12세 때부터 부산소년원을 들락거렸다. 군인출신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 반항기를 겪었다.
1983년 집이 싫어 무작정 상경해 껌팔이와 앵벌이를 하다가 강도·상해를 입혔다.
전과 8범의 그는 94년 3년6개월의 실형을 받고 보호감호처분까지 받아 10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95년 6월이었어요. 감방 안에 팬티 바람으로 누워있는데 갑자기 몇 만 볼트의 전기가 몸에 흐르는 것 같았어요. 옆에 있던 성경책을 붙잡고 데굴데굴 굴렀어요. ‘아이고 주님 제발 좀 살려주세요’를 외치는데 그동안 지었던 죄가 정말 영화필름처럼 지나가더라구요.”(정 목사)
유 목사도 2남2녀 중 장남이었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새아버지와 생활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머니가 사망한 83년부터 방랑생활이 시작됐고 교도소를 출입하게 됐다.
“대전의 합판공장에서 일하다가 무작정 상경해 창신동 떡 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장이 망하고 말았어요.
하는 일마다 안됐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갔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싸움질도하고 공공 시설물도 파괴했습니다.
그렇게 91년 보호감호 7년을 받았습니다. 친할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할머니가 찬송 부르시던 그 아련한 기억이 결국 감옥 안에서 저를 구원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유 목사)
두 사람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었다(롬 10:9~10). 삶이 180도 변화됐다. 동료재소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냄새나는 화장실 청소도 도맡아했다.
98년 성가대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고 정 목사는 악대(악기연주), 유 목사는 성가대복을 입었다.
두 사람 모두 폐쇄된 공간에서 성경을 수백 번씩 읽고 기도에 전력했다.
주변 재소자에게 쉼 없이 복음도 전했다.
그리고 정 목사는 2003년 출소 후 교회와 지역아동센터를 열고 목회자들이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돕는 80회가 넘는 예수군사사관학교를 매주 진행하고 있다.
유 목사도 2005년 출소하고 김에스더(59) 목사를 만나 결혼 후 기도원에서 사명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정 목사님과 제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겁니다.”(유 목사) “오늘도 저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가라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오며 복음만 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복음만이 사람을 바꿉니다.
이론이 아니라 저희처럼 정말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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