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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교수(가운데)가 6일 서울 마포구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추강 김필수 목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목사이자 소설가였고 웅변가 번역가에다 언론인이었다.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한국 기독교인은 외국인 선교사의 주도권 아래 대체로 보조적 역할에만 머물렀는데 추강(秋岡) 김필수(1872∼1948) 목사는 달랐다.


김 목사는 황성YMCA(서울기독교청년회) 창립이사, 한국인 첫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기독신보 초대 주필 및 편집인,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대표 번역자 등으로 활동했다.


말년엔 일제의 폭압이 심해지자 붓을 꺾고 꿩 사냥을 다니며 한시를 짓는 등 은둔 생활을 했고 본인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지도력 언변 문필 능력을 갖춘 교계의 한국인 지도자였지만 삶 자체가 베일에 싸여 있는 김 목사를 집중 연구해야 한다는 학계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6일 서울 마포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제370회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재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교수가 ‘추강 김필수의 유산: 목회자, 기독 사회운동가, 문필가’란 논문을 발표했다.


문헌 작업을 통해 김 목사의 삶을 여섯 장면으로 나눠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김필수란 이름이 문헌에 등장한 시기는 1900년 무렵이다.


한국에 장로교를 들여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어 성서 번역에 공을 세운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국어 선생으로 김필수를 추천한다.


경기도 안성의 부유한 선비 가문에서 태어난 김필수는 한학에 밝았다.


소년시절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와 엮여 함께 일본 고베로 도피했고 이때부터 단발을 했다.


레이놀즈와 함께 전북 전주에서 사역하던 김필수는 1903년 YMCA 창립 당시 12인 이사 가운데 단 2명뿐이던 한국인 이사가 됐다.


전주 신흥학교 교사를 지냈고 평양신학교를 2기로 졸업해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윤치호 김규식 등 YMCA 인사들과 함께 한국 대표로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 대회에 참석한다.


1915년엔 언더우드, 유진 벨 등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첫 장로교 총회장에 당선됐고 같은 해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창간한 기독신보의 주필로 취임한다.


해방 후 조선예수교서회 총무를 맡은 김춘배는 김 목사를 두고 “교양이 있고 음풍영월(吟風詠月)의 시정이 풍부했으며 깨끗한 문장을 쓰던 이”라고 기록했다.


김 목사는 1908년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는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비슷한 개화기 우화소설 ‘경세종(警世鍾)’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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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목사가 1908년 발표한 개화기 우화소설 '경세종'의 표지이다. '세상을 깨

우는 종소리'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인 양이 회의 주재자이며

마지막은 '아멘'으로 끝난다.



1924년부터는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산샹보훈연구’ ‘긔도의 생활’ 등 최소 16권의 신학서를 윌리엄 클락 선교사와 함께 책임 번역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진 1937년 무렵에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했다.


이 교수는 “한국교회 ‘대표’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렸으나 은퇴 후에는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진 김 목사를 다시금 조명하자는 뜻에서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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