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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민 김선희(가명) 전도사가 26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앞마당에 있는 대형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기도를 드리고 있다. 북한과 중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탈북민 김선희(가명·47) 전도사는 북녘땅에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번졌다.


힘들게 살아온 세월이 기억 저편에서 주마등처럼 스쳤다.


북한선교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김 전도사를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가 북한을 나온 것은 1998년 3월.


북한주민 대다수가 굶주렸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그의 가족도 형편이 어려웠다.


너무 배고파 갓난아이를 두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친척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국경 근처에서 군인에게 체포됐다.


어린 딸이 집에서 기다린다고 울부짖자 다행히 배낭만 빼앗고 풀어주었다.
당시 몰래 국경을 건너는 이들이 많았다.


붙잡히면 ‘조국을 배반한 변절자’라며 공개처형을 당하거나 감옥, 노동단련대에 보냈다.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걱정이 앞섰다.


‘중국에 갔다 온 것을 동네 사람들이 눈치채고 신고하면 어쩌지….’


더군다나 군인에게 붙잡힌 충격에 두려웠다.


춥고 떨리며 고열이 나 한 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졌다.


밤마다 검은 무리가 잡으러 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중국 친척에게 받은 돈이 있었지만 장사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병원비로 다 사용하고 말았다.
궁핍함이 계속됐다.


식량 배급이 끊긴 북한은 난장판이었다.


같은 해 8월.


그는 탈북 하는 가정을 따라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먹을 것만 구하면 어린 딸에게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함께 강을 건넌 사람 중 한 명이 인신매매 사기꾼이었다.


중국 헤이룽장성 농촌 총각에게 팔렸다.


울면서 어린 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사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국인과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매일 도망치는 꿈을 꿨다.


하지만 곁에 있는 딸을 두고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불행한 삶이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어미가 젖을 먹여야 하는 어린 자식을 두고 낯선 이국땅에서 심적·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어요. 그런 저를 동네분이 교회로 인도했으나 북한에서의 조직생활이 떠올라 좀처럼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난 딸아이가 세 살 되던 해.


집 앞 옥수수 더미에서 불이 나 심한 화상을 입었다.
동네 친척 남자아이의 불장난이 화근이었다.


급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조선족교회 전도사를 만났다.


그 전도사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기도해 주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때였다.


힘들었던 마음이 평안해졌다.


북에 두고 온 딸 때문에 매일 울어서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딸과 함께 인근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차츰 깨닫게 됐다.


다른 종교를 믿는 중국인 시부모는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성경을 태우고 교회에서 준 크리스마스 선물을 거리에 내다 버렸다.
한 집에서 두 신을 섬기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남몰래 중국인이 주로 다니는 동네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취한 중국인 남편과 말다툼이 벌어졌다.


남편은 연장을 집어 들고 죽일 기세로 덤볐다.


그는 그 길로 도망을 쳤다.


일하던 식당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식당주인은 보름치 품삯을 챙겨주면서 떠나라고 했다.


어린 딸에겐 미안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친척의 도움으로 중국 칭다오에 도착한 그는 직장에 다니게 됐다.


하지만 탈북자 신분으로 중국에 거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지 두려웠다.


결국 동남아를 거쳐 2007년 7월 자유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교육을 거쳐 배정받은 집에 온 그다음 날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맘껏 구경했습니다. 또 경기도 파주 도라산전망대에 가서 고향 쪽을 바라보며 북한과 중국에 두고 온 아이들을 그리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차츰 남한 생활에 적응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비롯해 전산회계, 컴퓨터 관련 자격증 등 모두 16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현재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처음 참석한 예배가 금요철야 예배였는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전에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젠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


이 교회 북한선교회에 가입해 한반도 평화통일과 북한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는 선교회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북한선교를 위해 적극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지난해 여의도순복음총회 목회대학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하며 서울 여의도 ㈔한반도평화화해협력포럼(이사장 최성규 목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와 함께 탈북민에게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일부 탈북민은 교회는 다녀도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들에게 성경을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듯 쉽게 알려 줍니다. 그러면 외로움을 털어놓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요. 그때마다 감동이 밀려오곤 한답니다.”


그는 복음전파에 열심이다.


교회와 선교단체 등에서 간증집회를 인도한다.


지난달 16일 서울 서대문구 NH농협은행에서 열린 ‘농협·농촌복음화 2018 전국대회’에서도 간증했다.


그는 간증에서 “지금도 통일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도하는 북한의 지하교인을 위해 기도해 달라. 탈북민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일꾼 되시길 기도드린다”고 당부했다.


김 전도사는 이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일만 생각한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임 받길 기도하고 있다.


그는 “선택할 여지가 없어 두고 떠나야만 했던 못난 어미를 용서해 달라”는 말로 애잔한 사자곡(思子曲)을 대신했다.


또 “내 아이들아. 건강하게 다시 만나야 한다”며 주먹을 불끈 쥔 채 연신 눈물을 글썽였다.  
 <국민일보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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