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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규 권사 (1881∼1942)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중반. 


전문 신학교육을 받은 대다수 목회자는 신사참배가 단순한 국가 의례라며 참여했다. 


하지만 강원도 동해 출신의 촌부(村夫) 최인규(1881∼1942) 권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감리교단이 1936년 신사참배는 국가 의례라며 참여하기로 한 결정을 거슬러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김승태) 부설 한국기독교역사문화아카데미와 두루투어는 지난달 31일 강원도 동해·삼척 곳곳에 남아있는 최 권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의 자취가 선명한 대표적인 장소는 1933년 설교자로 부임했던 동해 천곡교회다. 


수차례 옮기면서 옛터는 사라졌지만 현재 교회에 최 권사의 유해를 모신 순교비와 그가 직접 만든 강대상이 간직돼 있다. 


그의 유골은 1946년 삼척제일교회 앞에 안장됐다가 1986년 천곡교회의 요청으로 이장됐다. 


순교비에는 그의 일대기와 추모시, 사도행전 20장 24절 등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삼척제일교회 순교기념비, 동해 송정동 생가터가 아직 남아 있다. 


생가는 2006년 철거됐다. 


그가 처음 다녔던 동해 북평교회, 설교자로 섬겼던 천곡교회도 이동을 거듭해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순교 신앙을 간직하기 위한 교계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최 권사는 20대 때 아내와 사별한 슬픔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김한달 전도사의 아들 김기정 북평교회 목사를 만나 회심했다. 


1925년 12월 세례를 받고 1932년에는 권사 직분을 받았다. 


1933년에는 천곡교회 설교자로 옮겨갔고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모두 팔아 교회에 헌납했다.

당시 시대 상황은 암울했다. 


일제가 교회 내정에 간섭하면서 기독교 신앙은 점차 왜곡돼 갔다. 


하지만 최 권사는 “신사는 우상이다. 나는 하나님께만 경배하지 우상에게는 절할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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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걸(동해 천곡교회) 장로가 지난달 31일 천곡교회 앞에서 최인규 권사 순교비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결국 1940년 5월 체포됐다.


일제는 하나님을 못 믿게 하려는 게 아니라 국가의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라며 회유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망신을 주기 위해 ‘똥지게’를 어깨에 메고 동네를 다니며 “내가 예수 믿은 최인규입니다”라고 외치도록 하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내가 신사참배를 거역한 최인규올시다”라고 기쁘게 외치며 다녔다.


“일본도 죄악을 회개하지 않으면 로마처럼 멸망한다.” 


1941년 함흥지방법원 함흥재판소에서 최 권사가 변론한 내용의 일부다. 

그는 이 때문에 불경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신사참배 동방요배 등을 거부하다가 고문을 당했고 단식투쟁에 돌입하기도 했다. 


그는 몸이 쇠약해진 끝에 결국 1942년 12월, 6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안내를 맡았던 역사연구소 연구위원 홍승표 목사는 “최인규 권사는 감리교에서 가장 소외됐던 지역에서 참된 순교신앙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간직해 후대에 귀감이 되는 신앙인”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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