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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이자익 목사. 



지난달 27일 부산 영도구 대교로 땅끝교회(김운성 목사) 홀리조이센터에선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제이알피문화재단(JRP·이사장 김형대 목사) 주최 ‘제1차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 개혁과 회복운동 머슴 목회자 이자익(1879∼1959) 총회장 리더십 포럼’이 열린 것이다. 


이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큰 바위 얼굴’로 통한다. 


20여개 교회를 설립하고 세 차례나 장로교단 총회장을 지냈으면서도 명예나 권력, 재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은 농촌교회를 끝까지 지켰다. 

일제강점기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42년 장로교 총회를 재건한 그의 행정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함태영 부통령이 장관 입각을 제안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지금까지 목회자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목사로 종신하겠다”는 게 대답이었다고 한다. 

70세 고령에도 장로회 대전신학교를 설립한 열정의 목회자였다. 


교계 ‘법통’으로도 불렸다. 


교계정치 흥정에 흔들림이 없었으며, 현행 장로교 총회의 헌법은 1953년 그의 손에 의해 전면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북 김제의 대지주 조덕삼(조세형 전 국회의원의 조부)씨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 목사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떠돌이생활을 했는데 그를 불쌍히 여기고 집에 머슴 겸 마부로 받아들인 이가 조씨였다. 


조씨는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를 공부하는 그를 눈여겨봤고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했다. 


두 사람 사이가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영접하면서다. 


1902년 ‘ㄱ’자 교회 금산교회를 짓고 그해 가을 동시에 세례와 집사 직분을 받았다.


1907년 장로 1명을 투표로 선출할 때 교회 설립자인 조씨를 제치고 마부 출신인 이 목사가 장로로 선출됐다. 


조씨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고, 집사의 직분으로 잘 섬겼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조씨의 태도는 예사롭지 않은 신앙 결단이었다.


조씨는 이 목사의 믿음을 귀히 여겨 평양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고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부담했다. 


5년 뒤 그를 자신이 장로가 돼 섬기던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대지주가 자기 집안의 머슴이던 목사를 섬긴 셈이다. 


이번 포럼에는 이상규 고신대 교수, 허호익 전 대전신대 교수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섬김의 리더십’ 저자 김형대 목사는 강의에서 “이 목사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진실하고 겸손한 목회자였기 때문”이라며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의 섬김의 길을 따르는 종들이 곳곳에서 들풀처럼 일어나길 기도한다”고 했다.


JRP는 내년에도 전국교회를 돌며 이 목사의 섬김 리더십 정신을 회고하는 포럼을 지속적으로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JRP는 예수(Jesus), 부활(Resurrection), 평화(Peace)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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