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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민주화위원회 김영순 여성위원장



최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제재 대상 리스트에 포함하는 '북한인권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한 미국 정부가 '북한정치범수용소 보고서'와 '북한인권 개선전략 보고서' 등을 잇달아 내면서 대북 인권 압박의 강도를 계속 높여나가고 있다. 


북한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탈북민들의 생생한 증언과 호소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3만 탈북민 시대. 


이들 중 북한에서 초호화 엘리트 생활을 하다 요덕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겪은 뒤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한 여성이 있다. 


바로 2003년 탈북한 김영순(79, 사진) 북한민주화위원회 여성위원장이다.


 5일 그의 자택을 방문해 북한의 참혹한 인권 유린 실태와 이를 견뎌낸 그만의 눈물겨운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태극기를 좋아합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라요.” 

집안에 장식해놓은 태극기를 가리키며 그가 꺼낸 첫마디였다. 


태극기를 왜 좋아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야말로 우문현답이 나왔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니까요. 대한민국 국민이 우리나라 국기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진심어린 애국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몸을 일으켜 선반으로 향한 그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상자 하나를 꺼내보였다. 

상자를 들여다보니 수많은 사진과 책자들이 가득했다. 


이게 다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내가 북한에서 살아온 모습과 대한민국에 와서 국가를 위해 벌인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라며 자랑스레 말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그가 탈북 후 2004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일본, 스위스 등 11개 나라를 방문해 북한의 참혹한 인권실태를 국제사회에 고발한 모습과 대한민국 안보강화를 위해 교회와 학교 등을 방문해 500여 차례 특강 및 강연을 한 모습이 담겨있었다. 


김씨는 그 누구보다도 북한주민과 대한민국, 나아가 국제질서를 위해 발 벗고 나서며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인 것이다. 


사진 하나 하나를 설명해주던 그는 자신이 북한에서 겪었던 일과 지금 이 땅에 당당히 서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한에서 상위 

1%의 삶을 사셨다는데?


“제 오빠가 한국전쟁 당시에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습니다. 김일성과 함께 서울을 점령했죠. 오빠는 105 탱크사단이었는데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한 겁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상위 1% 계층으로 당국의 보호를 받게 됐고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 수 있던 거예요. 

저 또한 남부럽지 않게 지냈는데, 평양에서 당원으로 활동했고 북한종합예술학교 무용학부 1기생으로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바로 한국무용의 대가 최승희 선생님께 춤을 배울 수 있었어요. 

선생님은 정말 우리 민족이 낳은 최고의 춤꾼입니다. 

오빠 덕에 평양에서 상류층으로 살 수 있었는데, 이때 제 이름을 바꿨어요. 원래는 ‘영자’인데 북한당국이 ‘자’는 일본식 이름이니 바꾸라고 해서 ‘영순’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요덕수용소에는 왜 들어가셨나요?


“요덕수용소는 말이죠. 온갖 정치범들이 가는 곳입니다. 북한에서 정치범은 자신의 죄명도 모르고요 재판도 없이 그냥 바로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저도 제가 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끌려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보위부 312호 예심과로 끌려갔다가 수용소로 간거예요. 

연좌제 때문에 가족들까지 함께 갔어요. 정말 개처럼 끌고 갔어요.”

김씨는 동창인 성혜림이 자신을 찾아와 “영자야, 나 5호댁으로 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후 요독으로 끌려간 것. 

그는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89년에 보위부 반탐국장이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고 유언비어다. 

이 말을 어디서 들었다고 하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왜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성혜림 때문에 요덕에 끌려갔구나.’


-요덕수용소 생활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기자의 질문에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얼굴이 상기되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죽도록 일했어요. 

장진에 있는 금광에서 광석을 싣는 일과 광차에다 금돌을 싣고 밀어오는 일을 했죠. 

또 하루에 풀을 800kg 베는 일도 했어요. 정말 많이 다쳤습니다. 

풀 베다가 굴러 떨어지고 그러면 또 기어올라가서 풀을 베고, 이게 반복이었어요. 하루에 800kg 풀을 베는 건 불가능해요. 말이 됩니까? 

 “밥이요? 죽도록 일하고 받은 대가는 통강냉이 200g이 전부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뱀도 먹고 쥐도 먹고... 날아다니는 것, 기어다니는 것, 땅에 돋아나는 이름 모를 풀까지 안 먹어 본 게 없을 정도입니다.”

수용소에서는 매일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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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분 나르는 정치범들'. 일본의 후지TV가 27일 공개한 북한 함남 요덕정치범수용소 모습으로, 정치범들이 경비대와 보위부원들의 주택가를 돌며 인분을 퍼내, 나르는 모습이다. 후지TV 제공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 탈출을 시도해 붙잡혀 총살당하는 사람, 각종 병으로 죽는 사람까지 그 곳에서는 언제 죽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김씨의 부모님 역시 영양실조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큰아들도 이곳에서 사고로 죽고 막내아들은 훗날 탈북을 하다 총살을 당했다. 

김씨는 “남편도 제가 요덕수용소로 붙잡혀 가기 한 달 전에 실종이 됐어요. 나중에야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됐죠. 그 이유는 아직도 정확히 모릅니다. 이제 제게 남은 가족은 함께 탈북한 맏아들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함께 탈북한 아들에 대해 얘기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김씨는 손사래를 치며 ‘안된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랑의교회 집사님이신데 교회를 다니게 된 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처음 교회에 나간 건 46년 제가 9살 때 어머니를 따라서입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제게 ‘사람은 하늘을 비꼬면 안 된다.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탈북 시도 후 중국에서도 교회를 찾아 새벽기도를 드렸다. 


또한 2003년 드디어 대한민국 행 비행기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사명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 드렸다고 한다. 

김씨는 ‘사랑의교회’에 다니게 된 재미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먼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고 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그는 “대한민국에 와서 서울 지리도 모르는데 교회는 가야하잖아요. 그래서 택시를 타고 무작정 ‘교회 이름 중에 사랑이 들어간 교회로 가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도착한 곳이 서초구에 있는 ‘사랑의교회’였습니다.”라고 말하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김씨가 교회 집사를 한지도 벌써 10년이 다됐다. 


“처음 물세례를 받을 때는 영국에 가게 되어 받지 못했는데, 돌아와서 6개월 후 오종용 목사님께 물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어찌나 행복하던지요.” 


그때를 회상하며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어린소녀와 같았다. 


“북한은 지옥이고 대한민국은 천국입니다. 

지금 전 천국의 백성으로 살고 있어요. 대한민국은 제게 쉴 곳도 일할 곳도 그리고 자유도 선물해줬습니다. 

요독에서 고난당했기에 탈북을 하게 됐고, 천국인 대한민국까지 오게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 미래에 통일도 계획하고 계실 겁니다.” 


 김씨는 이어서 “통일은 반드시 돼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과 북 서로의 양보와 배려가 우선이지만, 언론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한에 대해서 그만 헐뜯고 안 좋은 소리 좀 그만하고 잘 지내면서 통일을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매일매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의 감사와 순종이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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