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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1483~1546)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독일의 신학자이자 사제였던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당시 교회는 제후, 귀족, 상인 등의 신분별 가격표에 따라 면죄부를 판매했다. 


지옥에 간 자를 위한 면죄부도 있었다. 


당시 교회의 부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루터의 반박문은 구교인 가톨릭교회로부터 신교가 나오게 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정신’을 담고 있다. 


반박문 발표일이 개신교의 종교개혁기념일이 된 이유다. 종교개혁 498주년을 맞아 ‘교회 개혁’을 강조했던 한 장로의 일기를 30일 들춰봤다. 


평생 교육자로 산 고 류제경(1917~2012) 장로는 1939년부터 약 70년 동안 114권, 2만1516쪽의 일기를 남겼다. 


루터와 같은 교회 개혁의 꿈을 품고, 철저한 회개운동을 주창했던 그는 ‘루터가 다시 태어난다면 교회 개혁을 위해 다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라고 썼다.



1919년 류관순이 만세 시위할 때 그 등에 업혀 


그는 일제 강점기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류관순 열사가 그의 5촌 당고모이다. 류 장로의 조부 류중무와 종조부 류중권, 류중권의 딸 류관순, 고모인 류예도가 모두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종조부는 만세운동 중 숨졌고 조부는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류관순은 고문을 받다 옥중에서 순국했다. 

‘나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할아버지는 전도사이셨고 외할머니는 권사이셨다. 


또 애국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류관순의 부모이자 나의 종조부 종조모는 왜경이 쏜 총에 쓰러지셨다. 나의 조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어머니는 내가 류관순 열사의 등에 업혀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말씀해주셨다. 


나 자신도 일왕이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주장했다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가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한다.’(98년) 


류 장로는 교사였던 부친 류경석 장로와 첫 여성 경찰서장을 역임한 어머니 노마리아 장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941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사에 재직할 때이다.

‘일본이 마음껏 우리를 짓밟았을 때… 나는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기소됐다. 


공주경찰서는 나를 잡아넣겠다고 작정하고 제자들을 구금하고 위협했다. 나는 제자들을 모두 풀어주면 그들이 한 증언을 모두 인정하겠다고 했다. 제자들은 풀려났다. 


나는 대전 법정에서 판사는 법을 전공했고 법 정신에 서서 정의롭게 판결을 해야 할 것인데 억지로 죄인을 만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일본은 머잖아 멸망할 것이다. 


판사는 현해탄을 건널 때 이 피고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명심하고 정당한 판사가 되시오라고 했다.’(97년)


검사는 2년을 구형했고, 판사는 그에게 3년을 선고했다. 


류 장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담대함과 민족주의자로서 기백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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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제경 장로가 1983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류관순 열사의 생애를 기록한 안내문을 

읽고 있다. 류 장로는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5촌 당고모인 류 열사의 등에 업혀 있었다고 

한다.    신앙과지성사 제공



‘교회가 돈 봉투를 만들어 내는 곳이 되어서야…’ 


국가 교수자격심사위원회에서 불문과 교수 자격을 취득한 류 장로는 64년 공주사대 불어과 교수로 부임, 88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매일 일기에 신앙과 삶을 기록했다.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류 장로는 예레미야와 같은 노(老)선지자의 탄식과 기도를 일기에 썼다”고 평가한다.


류 장로는 외부 초청으로 말씀을 종종 전했다.


‘약 백여 명 성도가 참석했는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끝나니 무슨 물건을 준다. 집에 와서 보니 봄 내의 한 벌이다. 지금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사례해야 되는 시대이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그런 정신은 사라지고 그냥은 안 한다는 장사꾼 시대가 온 것이다. 설교의 대가를 받은 것이 개운치 않다.’(79년) 


사례비와 거마비 관행이 남아 있는 한국 교계가 아프게 읽을 대목이다. 

그는 프랑스 출신 사제로부터 불어 강습을 5년 동안 받았다. 


‘프랑스 신부님 생일 축하연에 초대받았다. 한국 신부님을 중심으로 각 교회 회장단이 열심히 토론을 했다. 


신부님은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 회장단은 신부가 교회 중심이라고 각각 주장하며 열을 올렸다.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상당히 큰 소리를 그쪽을 향해 말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라고.’(81년)


그는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어렸을 적엔 예배당에 가려면 연보(捐補)를 가지고 갔다. 捐은 버린다, 補는 돕다란 뜻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 그 연보가 지출됐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느 교회나 연보라고 하지 않고 헌금(獻金)이라고 부른다.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꾸며 가난한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되었다.’(84년)


‘뻔뻔스럽게도 돈 봉투에는 기도제목을 적게 했다. 돈봉투에 돈을 내면 그 기도제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목사가 그 기도제목을 한 묶음 놓고 도매금으로 기도를 해준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교회란 봉투를 만드는 곳이다.’(89년) 

‘지금은 학식이 있고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평소에 수시로 목사에게 선물을 안겨주고 헌금과 십일조를 약간 많이 하면 장로 되기란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90년)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초청하는 잔칫집” 


류 장로는 교회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 썼다. 

‘개혁에는 내적인 변화가 앞서야 한다. 나 자신이 생각을 새롭게 바꿔야 개혁이 된다.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중심점으로 돌아가야 한다.’(93년) 


‘종교개혁자는 스스로 자신을 개혁하는 자였다. 

제도나 의식이나 종교지도자가 아닌 오로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며 하나님 말씀에 기꺼이 따르는 의지의 용사들이다.’(96년)


발췌된 일기를 보면 류 장로가 매우 직선적이고 강직한 인물로 느껴진다. 


하지만 류 장로의 장녀 류희상(64·용두동교회) 권사는 “아버지는 매우 온화하고 유머러스하셨다. 

우리 오남매 뒷바라지가 버거우셨을 텐데도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의 학비를 대셨다”고 전했다. 


류 장로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행복이 깊어진다고 여겼고 행함을 강조했다. 

‘마르틴 루터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성경 말씀에 따라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확실한 믿음을 통한 행함이 진실한 행함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행하는 자로 인해 기뻐하실 것이다.’(98년)

그는 어떤 교회를 꿈꾸었을까.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며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 초청한다. 그들이 그 잔칫집을 채운다. 


먼저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그들을 기쁨으로 섬긴다. 참된 교회는 잔칫집 같아야 한다.’(2008년) 

류 장로의 일기를 소장하고 있는 감신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최근 일기 일부를 발췌 편집해 ‘근원을 찾아서-류제경 장로의 교회 개혁 이야기’(신앙과지성사)라는 단행본을 냈다. 직접 발췌한 최태육 박사는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는 것, 크리스천이 말씀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이웃을 살리는 것,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류 장로의 교회 개혁 방향”이라고 설명한다. 

류 장로는 자신의 성숙을 위해 매일 글을 썼다. 


그의 일기는 교회를 바꾸려면 우리 각자가 매일 자기의 삶 속에서 ‘루터’가 돼 행동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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