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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일부 교회에선 여전히 신앙성숙의 척도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방언은 이미 중지된 은사(은사중지론)일 뿐이다. 


‘방언’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도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크리스천에게 ‘방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못 받았다면 받도록 사모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받았다면 가짜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방언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고 오해인지 성도들을 혼미케 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과 교회사적 측면, 그리고 신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검증한 책이 출간됐다. 


평택대학교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성경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방언’(킹덤북스)이다.


김 교수의 방언 관련 저서는 이번이 세 번째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 2008), ‘신약이 말하는 방언’(킹덤북스 2009) 집필을 통해 신앙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의 방언을 다룬 바 있다. 


이번 저서는 방언 신학과 교회사에 나타난 방언, 그리고 방언중지론에 대해 담았다.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방언이 신앙생활에 매우 유용하며 성경의 원리대로 사모하면 방언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김동수 교수는 한국교회에서 방언 논쟁을 네 가지 입장으로 정리했다. 


▲방언중지설: 방언은 중지됐기 때문에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 적극 지지설: 방언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지금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방언 소극적 인정설: 방언은 지금도 유용하지만 방언 체험 유무는 성령에 의한 것이므로 신자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평화주의자: 논쟁은 좋지 못하며 이 문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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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교수는 방언 적극 지지의 입장에서 신학자로서 방언이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관해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방언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것에 저서를 통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방언이 지금까지 학자들과 신자들이 흔히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학적 주제임을 다뤘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 국제성령신학연구원 사무실에서 열린 ‘방언, 성령의 은사’ 북콘서트에서는 신학자, 목회자, 성도 등 방언에 관심 있는 청중들이 모여 김동수 교수의 ‘방언’에 대한 연구 결과와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와 저자 김동수 교수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어 소개한다.



- 방언에 차별이 있던데, 남자들보다는 여자가, 강남보다 강북이, 유럽보다 아프리카에서 방언을 더 잘 받더라. 

심지어 진보보다는 보수에 속하는 쪽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계몽주의와 현대주의 사고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몸을 쓰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몸이 컨트롤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 기도 방식에는 묵상 기도가 많고 방언 기도가 없다.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방언을 덜 받는 것 같다. 


계몽주의적 은사중지론, 세대주의적 은사중지론 사상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거 같다. 


이미 정신 속에 들어간 사상이 있으면 방언을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한 사회학자는 1970-80년대에 낸 책에 보면 방언은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이 주로 하고, 배우고 잘난 사람들은 안 한다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설명하기도 했다. 


평균적으로는 낮은 사회 부류에서 방언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불변의 법칙인 것은 아니다. 


최근 온누리교회 같이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방언을 많이 한다는 것이 이것을 방증한다.


그래서 방언을 체험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언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담임 목사가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보다 방언 체험이 더 많다.



- 방언해도 사람이 성숙해 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인격이 변하지 않고.

특히나 방언하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던데, 어떤 입장으로 설명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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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방언이 아니라 3층천을 갔다 와도 사람이 안 변한다.(웃음)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인격 자체가 완전히 변해 천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표현이라는 게 노동자 분들(워킹클래스)는 마음보다 말이 거칠다. 


배운 사람들은 마음보다 말이 훨씬 더 부드럽다. 


배운 사람들이 마음보다 말을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배우는 거다. 


매너 없이 표현하는 걸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셨기에 거친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깨끗하다고 본 경우가 많다. 


방언이 신앙성숙에 이바지 하지만 방언을 비롯한 어떤 신앙 체험도 사람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방향성이 분명하다면 개인적으로는 영적 체험이 강할 때 인격이 꾸준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되긴 하더라. 

통역에 대해 질문해 보겠다.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는 통역도 중요하다. 

방언은 강조되는데 반해 왜 통역은 약할까?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 수 있나?



현상으로 통역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방언 천명이면 통역 한명 있을까 말까다. 


방언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입술만 맡기면 쉽게 터진다. 


하지만 방언 통역은 임해도 막상 하기가 두려울 거 같다. 


그래서 통역이 많지 많다. 또 통역을 하려면 통역의 장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교회 예배 시에는 찬송시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었다(고전 14:26). 은사집회 같은 형식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의 예배가 포멀화(formal) 됐다. 


우리나라는 오순절 교회도 똑같다. 


주일 낮 예배는 장로교식 예배고, 금요철야예배는 순복음식 예배다.


금요철야예배라도 은사집회가 있으면 좋은데 장이 없고, 모델이 없었다. 

토레이 신부님이 원장으로 있던 예수원에는 그런 것들이 좀 있었다. 


방언 통역이 임했을 때 해보고 검증도 받아보고 이런 게 있었다. 


오순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집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통역이 모두 있으려면 권위가 담임목사에게만 있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임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의 위계질서, 유교적 가부장제의 폐해 같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가부장제가 자유함을 빼앗았다.(웃음)



- 가짜방언은 어떻게 구별하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나도 가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짜방언이라는 것은 누가 퍼드렸느냐.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간다. 


‘가짜방언’이라고 할 때 움츠러들지 않나. 


천사와 마귀 중 누가 이 풍문을 퍼뜨렸냐고 묻는다면 마귀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진짜나 가짜냐를 구분하라고 하는데, 고전 14장에는 두 세 사람이 방언하고 한 사람이 통역해서 분별하라고 한다. 


또 신앙고백 여부로 구별할 수 있다(고전 12:3). 


실제 집회에서 가짜방언은 우려할 만큼 많지 않다고 본다.



- 방언은 신의 언어인가?


언어학 분야 논문을 보니 방언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언어학 규칙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


 실존하는 언어는 아니다. 


그러면 방언이 하나님의 말인가? 


‘천사의 말’ 이라는 표현은 아름다운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방언이 하나님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는 아닐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혀에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혀는 해보지 않은 발음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근육의 움직임을 뛰어 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한다. 

그래서 방언을 ‘other tongue’이라고 하는 것이다.



- 방언은 외국어여야 하는가? 

종종 외국어 방언이 검증된다고 하던데, 언어학자들이 조사해 보면 거의 UFO 발견처럼 근거가 없는 얘기인 경우가 많다.


누가는 성령 세례를 설명하던 중에 방언을 말했다. 


성령, 은사, 충만, 세례를 풀다보면 방언이 나온다. 


사도행전 2장에는 방언이란 말만 있고 외국어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지금과 같이 똑같이 방언이 터진 거고, 알아듣는 기적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오순절 사건에서만의 일회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는 성령론이 아니라 구원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사도행전 2장은 특수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듣는도다’라는 의미가 다른 나라 말로 유창하게 한다는 내용은 아닐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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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이 바로 이런 유익이 있다는 설명을 한다면?


바울이 말한 건 두 가지다. 고전 14장에는 자기를 ‘오이코도메’ 한다고 하고 있다. ‘빌드 업(build up)한다’ 곧 ‘허물어진 것을 세운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이코도메오(세운다), 오이코도메(세움)라는 말을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주로 썼다. 


방언으로만 회복할 수는 없지만, 희로애락, 마음의 상처, 마음의 응어리 이런 것들이 회복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돕는다는 의미로 방언을 사용한다. 


성령의 기도인데, 피조물이 탄식하고 처음 익은 열매 신자들이 탄식하는 것에 공감한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이 나의 기쁨, 희로애락에 공감해 주신다는 거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신자들을 조사해 보니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참석률에 가장 크게 있더라.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참석률이 높았다. 


다른 차이보다 깊이 기도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방언의 체험 중 소개해줄 만한 체험이 있는가?


인생의 위기 때마다 대부분 기도로 극복했는데 그 때마다 방언 기도를 했다. 


어느 대학에 갈까, 어디로 유학을 어떻게 갈까와 같은 모든 문제를 새벽기도에서 방언 기도를 하며 결정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갔을 때는 기도로 결정하고도 3년을 후회했다.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10년 후에 돌아보니 대부분 좋은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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