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2.jpg

성경의 가장 드라마틱한 전투장면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있다면 조선 역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鳴梁海戰)’이 있다. 

두 싸움 모두 최악의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를 일궈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공통점이 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절대적 열세에 놓인 주인공이 일으킨 반전의 묘미는 이야기를 경험하는 독자나 관객에게 희열감을 제공할 뿐이지만 내적으로는 어려운 현실을 이기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훌륭한 교훈을 주고 있다. 

김한민 감독의 역사 활극 ‘명량’은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물리친 임진왜란의 가장 극적인 전투 명량해전을 다룬다. 

모함과 고문 속에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최민식)은 잔혹하고 해전에 능한 왜구들의 우두머리 구루지마(류승룡)와 조선의 운명이 달린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이미 영화나 TV 드라마로 여러 번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조차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역사의 사건을 다시 영화로 만드는 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과 같은 신기술 발달에 따른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서 높은 흥행 성적을 기대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영화에 담긴 이야기가 재해석 과정을 통해 현실에 필요한 메시지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 ‘명량’을 주목하는 이유는 두 번째에 가깝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논하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첫째는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보여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십’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즉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명언은 바로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이 부하장졸에게 행한 연설 가운데 있다. 
영화에서 이순신은 안위와 같은 최측근 부하들마저 승산 없는 해전을 포기하기를 종용할 때 편안한 잠자리를 주었던 진영의 가옥들을 모두 불태우고 죽을 각오로 전쟁에 앞장선다.

현재 교회의 위기는 세상과 싸울 줄도 모르고 또한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갈 2:20) 고백은 하지만 돈과 권력, 명예와 쾌락 등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악착같이 살기를 원할 뿐이다. 

적어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알의 밀이 죽음 없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요 12:24) 깊이 생각해야 한다. 

둘째는 백성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원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비결이다. 

이순신을 따라 온 전라도 연안 백성들은 수군에게 의복과 식량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군에 자원입대해 배 안에서 노를 젓고 백병전에 나서기도 한다.  또 왜군의 폭탄선박 공격이나 울돌목의 회오리로부터 이순신의 전함을 구하는 용기와 지략을 발휘한다.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장수와 백성 간의 연합하는 일체감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교회는 이순신이 그러했듯 백성의 신뢰를 얻어야 교회도 살고 또한 백성도 살릴 수 있는 법이다. 
지역주민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이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셋째,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살펴 실행한 지혜로운 전술은 승리의 결정적 열쇠다.

명량해협의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은 조류의 흐름이 빠를 뿐만 아니라 변화가 무쌍하여 회오리에 한번 빠지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물길이 바뀔 때까지 울돌목에 닻을 내려 역류를 견뎌내는 이순신의 지혜는 어디서 온 것일까. 

영화를 보면 이순신은 물의 흐름을 잘 간파하고 있는 마을 주민의 말에 귀 기울이며 거듭 물길을 살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당부한 말씀은 비둘기 같은 순결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뱀 같은 지혜로움(마 10:16)을 함께 요구하셨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울돌목같이 위험하지만 승리를 위해 교회는 세상을 아는 지혜를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명량.jpg
강진구

한국노컷뉴스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