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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정인 목사
<프리몬트 제일 장로교회>


한 어린 여자아이가 엄마가 없는 동안 창고에서 페인트 가져다가 벽에다 황칠을 해놓았고 방바닥에 왕창 페인트를 엎질러 놓았다. 엄마가 돌아 와 보고 기겁을 한다. 엄마의 화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아이가 얼른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엄마 다시 안 할께’ 울며 애걸한다. 이 애걸에 엄만들 어떻게 하겠나? 단지 “다시 그러지 마라!” 할 뿐이 아니겠는가?
성경의 삼손은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생애를 살았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은 한 민족을 책임지는 사사였지만 그의 위치를 떠나 하나님께서 금한 일들과 부모를 거역하는 독선과 방종 그리고 엽기적인 삶을 살았다. 더구나 그는 한 여인에게 빠져 하나님의 천기까지 누설하여 사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는커녕 원수의 나라 블레셋에게 잡혀 눈이 뽑이고, 놋줄에 매여 맷돌질을 하면서 원수들 앞에 재주를 부리면서 조롱을 당한다. 그는 옛날 나귀 턱뼈로 천명을 쳐 죽인 후에 목말라 죽을 지경일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께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이번 한번만’(just this once)이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다시 힘을 주셔서 다곤 신당을 무너뜨림으로 그 안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을 그가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이 죽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삼손의 생애가 바로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대표한다. 그것을 사사기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나타난 구절을 간추려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이다. 곧, 그 모습을 4 R로 표현할 수 있다 - Rebetrayal, Retreat, Repentance, Restoration.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난 배반한 삶(Rebetrayal)이 이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셔서 그들은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다(Retreat).이 고통 속에서 그들은 각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다.(Repentance)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다시 용서와 구원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Restoration) 이러한 삶을 그들은 사사시대 340년을 계속 반복했던 것이다.
삼손의 모습은 전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시대의 모습이지만 또 우리의 모습의 모습을 대변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라도 타락할 때는 그의 공의에 따라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무조건 우리를 오냐, 오냐 하면서 받아 주시지는 결코 않으신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들로 하여금 충격을 주어 ‘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의 자리로 인도한다. 곧 하나님의 책망은 그에게로 돌아 오기 위한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죄에 대한 책망이다.(요16:8)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겹도록 반복되는 타락의 악순환,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도 놓쳐버릴 수 없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염치없이 부르짖을 때는 하나님은 너그럽게 사랑으로 모두 받아 주셔서 용서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성경에 삼손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이 많이 있다. 니느웨성이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뜻을 돌이켰고, 탕자가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보고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받아 들였고 아들의 권위를 회복 시켜 주셨다.
우리 역시 믿음의 사람이지만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연약함 때문에 거듭 ‘안하겠다.’ 작심하면서도 되풀이 범죄를 저지른다. 우리가 이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나는 버림을 받았다’라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번 한번만’ 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야한다. 그럴 때 일곱 번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풍성한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회복시켜 유쾌한 날을 허락해 주신다.
부족한 저도 목회 초반에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목회가 안정이 되어 가는 즈음 나는 하나님께 범죄를 저질렀다. 어느 모임에서 내 알량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함에도 불구하고 해버렸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앗아 가셔서 곤고한 지옥을 맛보는 시간을 보냈고,  더구나 난데없이 우리가 빌려 사용하는 미국교회에서 퇴출 명령을 받았으며, 또 교회에 분규가 일어나서 자칫 교회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공중분해 될 위기였다.
해결은 하나님께 싹싹 비는 길 밖에 없었다. 그 때 단지 ‘하나님, 이번 한번만’ 하고 통회의 기도를 드렸다. 저에게도 기도의 응답은 물론이며, 새로운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내 생애 드린 기도 중에 가장 기뻐하셨던 기도라 하셨다. 지금도 위기가 오면 그 기도를 생각하면서 되풀이 십자가 밑에 가서 그 때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 이번 한번만” 하고 또 읊조린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사 삼손을 기독교 역사 중에 가장 존경을 받는 다윗과 사무엘 선지자 등과 같이 ‘믿음의 조상’(히11: 32)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말 이것은 우리의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무엇때문에 그를 큰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을까? 삼손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 ‘이번 한번만(just this once)’(삿16: 28)하고 간절히 회개 하며 간구했기 때문이다.
회개는 기독교의 첫 시작이며 근본이다.(마4: 17, 막1:15) 이 회개로 오직 용서를 받은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간절한 회개의 기도는 우리의 죄 사함과 문제들을 해결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신앙의 성숙한 길로 인도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변화 시켜 준다. 우리도 강림절을 맞이 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이번 한번만’ 하고 하나님께 간절한 회개 기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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