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인 <남가주 메시아 합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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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유행했던 노래의 제목이다. 50여 년 전 간드러진 음성으로 구성지게 불러대던 여가수와 당시 그 노래를 즐기던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서리를 가득 이고 있다. 그런데도  ‘해애당화 피고 지는 서엄마을에 처얼새 따라 찾아 온 총각 서언생니임 ~ ~’은 여전히 뜻을 아는 이들의 가슴을 후비고 있다.
지난 주에는 이 노래와 제목이 내내 입과 머리 속을 맴돌았다.  멕시코 국경에서 남쪽으로 약  400킬로미터 떨어진 산 퀸틴에서였다.
의료선교로 13년간 산 퀸틴의 원주민을 돌봐 온 닥터 최를 따라 간 4박5일 기간 동안 ‘섬마을 선생님이지 뭐”라는 말이 자주 튀어나왔고 마음이 무거웠다. 뒤에 두고 오는 원주민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특히 크고 맑은 눈동자의 아이들과 희망이라곤 없다고 속내를 털어놓던 십대 엄마들, 여드름투성이 청년들의 뒤따라 오던 시선이 그랬다.
현지에서의 의료선교, 자원 봉사, 사랑 나눔의 방법은 거의 같으니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가난한 그들의 자존심을 최대한으로 지켜주면서 가져간 물건이나 직접 만든 라면을 나눠주는 것도 어느 단체나 그럴 것이다.
기독교인인 닥터 최가 십 여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매년 6회씩 소외된 이들에게  거의 혼자서 찾아가 손길을 건네 온 것이 대단한 사랑실천이며 그의 미션은  뜻있는 사람들이 사랑의 마음과 물질, 시간을 보태서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번 동참으로 알아 낸 바하 힐링 미션의 거의 전부다.
몇 년 전부터 “한번 가야죠 “라고 했던 말 빚을 갚느라 스패니시를 잘하는 젊은 엄마와 15세 된 딸을 독려해 따라 나섰다.
닥터 최와 한의사, 간호사, 선교사가 트레일러가 달린 진료 차량을 운전하고 우리 3명의 여성이 조그만 차를 운전하고 뒤따랐다.
위험한 멕시코를 왜 가느냐는 주변 협박(?)에 갈등이 생겨 국제전화로 신앙 멘토인 여동생에게 호소했다가  “언니, 선교는 목숨 걸고 하는 일이야!  살아 돌아올 생각 말고 떠나요 기도할께!”라는 말을 듣고 출발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
산 퀸틴은 흙먼지 바람이 생생 부는 황량한 곳이었다. 닥터 최 말에 따르면 이 지역은 농장주 몇 몇이  먹여 살린다. 일꾼들이 대거 필요한 농장주들이 슬레이트와 천막으로 칸을 막은 형태의 집을 벌판에 만들어 놓고 인력의 이탈을 막고 있다. 새벽부터 오후까지 농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이 이들 삶의 거의 전부인 셈이다.
이들은 멕시코의 다른 도시와도 소통이 안 되는 곳이다. 가끔 닥터 최의 일행, 그리고 한국교회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또 선교하기 위해 온다. 외부세상과의 통로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두 아이 엄마인 스무 살 칸디가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사진 한 장에는 정말 수려한 한인청년이 칸디와 또 한 명의 처녀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칸디에게 그는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이번에 동행한 15세 릴리도 원주민 청년들에게 섬마을 선생님이 되었다. 위험하다고 헐렁한 농구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온 릴리지만  너무 예쁘다고 모여든  청년들이 난리가 났다. 말도 전혀 안 통하지만 수줍은 사모의 표현을 온몸으로 하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진료도 마치고 도네이션 된 물품을 나눠주고 라면도 하나씩 직접 끓여주고 밤늦게 떠나오는 차량 뒤에서 릴리와의 눈인사를 조금이라도 더 하려고 하는 청년들의 얼굴에서는  “ LA 엘랑 가지를 마오 떠어 나지 마오오”라는 섬마을 선생님 마지막 구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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