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으로 보낸 자식 예배당 가야 마음이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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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창 목사(오른쪽)와 임인순 사모가 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목포항에서 서남쪽으로 115㎞ 떨어진 투명한 코발트색 바다 위로 갈색 바위섬이 떠있다.
위에서 내려보면 거대한 누에가 누워 있는 모습을 닮은 이 섬 전체는 낙조에 붉게 물들어 보여 홍도(紅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루는 홍도 주변으로 크고 작은 무인도들이 오묘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섬 자체가 196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 만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곳에 매년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30만 마리의 철새들도 매년 천혜의 도래지인 홍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쉬었다 간다.
목포항을 떠난 쾌속선에서 내려 시장골목처럼 포장마차가 길게 늘어선 홍도 선착장을 빠져나오면 절벽 위에 솟아있는 십자가가 눈에 띈다.

떠나도 남아도… 자녀들을 위한 기도
서울 여의도 면적의 4분의 3쯤 되는 홍도에는 5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홍도남부교회에 등록된 교인은 60명이지만 실제 예배당을 찾는 성도는 70대 이상 10여명에 불과하다.
1958년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홍도남부교회에 다닌 ‘1호 교인’은 김영애(75) 할머니다.
쓰레기소각장에서 일하는 김 할머니는 집에서 10분쯤 비탈길을 올라가야 도착하는 교회에서 매일 잠깐이라도 기도를 하고 간다.
그는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막 그래도 침 맞고 교회 나가면 괜찮응께”라면서 웃었다.
8남매를 둔 김 할머니는 “뭍으로 떠난 자식들이 걸려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요잉. 아직 자식들 다 전도를 못한 게 좀 그라제”라고 했다.
섬을 떠난 자식들 못지않게 걱정되는 건 막내아들이다.
36세 막내와 단 둘이 홍도에서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밤낮없이 우리 막내 장개 보내 달라고 기도도 하고 장가가야 쓴다고 하면 갸는 삐걱삐걱 웃기만 해부러”라고 말했다.
그나마 고마운 일은 김 할머니의 막내가 지난 3월 크리스천이 된 것. “(교회에) 느닷없이 (막내가) 나왔소잉.
주일날 오토바이에 짐 싣고 가다가 브레이크가 안 돼서 차가 뒤집어졌는디 지가 살았다고…. ‘엄마 기도로 살았나봐’ 그랬당께. 그라고 나서 교회에 나왔지라.”
50여년 전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서 홍도로 시집온 김 할머니는 “하나님을 수십년 믿어도 (성경 말씀을) 까먹어부러. 만날 열심히 성경 보고 그라는데잉”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포장마차에서 해산물을 파는 박성미(48·여)씨도 “목포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딸과 아들들 잘되라고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는 거 아니겄소”라고 했다.
흑산초등학교 홍도분교가 홍도에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라서 이곳 어린이들은 중학생 때부터 목포로 유학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홍도 인근에서 해녀가 직접 따오는 해삼, 전복, 소라 등을 즉석에서 손질해 파는 박씨의 포장마차 간판명은 ‘에덴포차’다.
구약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 “손님들 뿌리치고 예배당에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랑께.
그래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가슴에 새겨져 있응께 주일예배에는 빠지지 않고 있지라.”

무사귀환 빌던 마을 제사 사라진 지 오래
전형적인 어촌답게 홍도에는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뱃사람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뜻에서 마을 제사인 당산제를 지내는 게 오래된 풍속이었다.
무엇보다 텃세가 심한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홍도남부교회에서 5개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떠난 목회자가 20명이 넘는다.
85년 4월 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장세창 담임목사는 “예전에 어떤 전도사는 교회를 싫어하는 마을사람들한테 아무 이유 없이 구타당하고 섬을 떠난 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꿋꿋하게 한 자리를 지켜온 ‘믿음의 힘’은 이미 마을 곳곳에 드러나 있는 듯했다. 지난달 31일 만난 홍도 주민들은 교회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배 탔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으면 으레 무당이 굿을 했어요잉. 근디 교회에 사람들이 그러지를 못하게 하지 않았겄소. 무당 하다가 권사님 돼서 돌아가신 양반도 있었응께. 이제는 그 며느리가 교회에 충성을 하제.”
“내 남편은 목포항을 드나드는 유람선 승무원인디 제사 같은 거 잘 안 지내부요. 몇 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모여서 고기 잘 잡히고 안전하게 거시기 해달라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이젠 안 한당께. 우상 모시면 안 되는 거 아니겄소잉.”
목포해양경찰서 홍도출장소장 김인(48) 경위는 “여기에서 자란 30대 중반 주민 대부분은 장 목사님이 어린시절부터 돌봐준 사람들이니까요. 그만큼 복음이 잘 전파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했다. 식당을 하는 김정자(46·여)씨는 “얼마 전 목사님이 목포에서 치과의사들을 모시고 와서 무료 치료를 받게 해줬는디…. 목사님 봐서 ‘(교회에) 간다, 간다’ 하는데도 먹고살기 바빠서 잘 안 돼부러”라고 말했다.
장 목사가 홍도에 처음 부임했을 때 교회는 낡은 60㎡(18평)짜리 단층 슬레이트 건물이었다. 비가 새는 곳이 많았고 여름이면 예배당 건물 틈으로 독사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92년에 낡은 건물을 헐고 새 예배당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장 목사와 성도 10여명이 직접 블록과 시멘트를 옮기는 작업에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그해 2월 한 성도가 녹이 슨 종탑을 뜯어내는 작업을 하다 바닥으로 떨어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
공사비가 부족해 전전긍긍하던 때 목포에서 수산업을 하던 사업가가 지원을 해줘 간신히 공사는 마무리됐다.
장 목사는 “10돈짜리 어머니 반지를 뺏어 와서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반지를 파니까 돈이 꽤 되더라구요. 친구들한테도 신세를 많이 져서 공사는 마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165㎡(50평) 규모로 확장됐지만 자주 태풍 피해를 입는다. 2010년 곤파스가 상륙했을 때는 교회 지붕이 주저앉고 2층 예배당 창문이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54년간 자리를 지켜온 교회는 도움을 자청한 한 사업가의 지원으로 금세 복구됐다. 앞으로도 홍도 토박이 성도들뿐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안식처로서 명맥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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