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원 11곳에 교회 세운  김원균 겨자씨 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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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원생에게 매주 2시간의 토요찬양예배는 몇 안 되는 자유시간이다. 김 목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소년원 기독교실에서 원생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폭행 사건에 휘말려 서울소년원에 온 이준명(18·가명)군은 최근 두 명의 양아버지가 생겼다.
형기를 마친 뒤 본격적으로 권투를 지도해 줄 자원봉사자와 김원균(62) 겨자씨선교회 목사가 그들이다.
소년원생을 ‘아들’이라 부르는 김 목사가 준명이의 꿈이 권투선수라는 걸 알고 소년원 자원봉사자인 고 최요삼 선수(WBC WBO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의 양아버지 박태훈 전 숭민프로모션 사장을 이어준 것이다.
인생의 멘토와 신앙의 아버지가 생긴 이군에겐 이제 목표가 있다.
4년 뒤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 그는 “나쁜 일을 저질러 소년원에 다시 들어왔지만 목사님을 만난 뒤 내게도 꿈이 생겼다”며 “나가서도 계속 운동해 권투로 대학도 진학할 것”이라며 당당하게 말했다.
34년간 국내 소년원 11곳에 교회를 세운 김 목사에겐 이군과 같은 아들이 500명이 넘는다.
그는 소년원 퇴원 후 갈 곳 없는 이들에게 검정고시를 통해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거나 비록 이른 나이지만 일자리를 소개해 사회에 진출하도록 돕기도 했다.
그를 본받아 목회자나 선교사가 된 아들도 11명이나 된다.
지난달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사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소년원 출신 성공인사’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박관일 탄자니아 선교사도 그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이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소년원 기독교실에서 만난 김 목사는 이들의 양육 비결을 ‘기적’이라고 밝혔다.
세상의 ‘죄인’에서 ‘바른사람’이 되기까지는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확신이다.

약속을 기억해내다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전도로 열한 살 때 처음 교회에 나갔다.
전기도 없던 시절, 예배당은 그에게 새로움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좋았다.
열두 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막연하게 목회자의 꿈을 꾸는 계기를 경험했다. 성극 ‘선한 사마리아인’ 공연을 통해서였다.
“주인공 연기를 하는데 제 마음에 ‘아, 나도 이렇게 살아야겠구나’라는 막연한 감동이 왔어요. 그래서 연극을 마치고 바로 어머니께 달려가 얘기했죠. ‘나도 어른이 되면 불쌍한 사람을 돕는 교회 전도사님이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성인이 되면서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자신이 목사가 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만 같았다.
확신이 없을 바엔 목사가 되지 말자고 생각한 그는 여러 직장을 돌며 기술을 배우다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하던 어느 날, 그는 온 몸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군의관은 “창자가 썩는 병인데 원인을 알 수 없다”며 무려 28일간 고단위 항생제를 줬다.
그를 다시 부른 군의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현대의학으로 불가능한 병”이라면서 “서울의 한 병원에 독일에서 유학한 의사가 있으니 그를 찾아가라”며 진료의뢰서를 건넸다.
경기도 양평의 부대에서 나와 병원으로 가는데 온 몸에 열이 났다.
그때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목회자가 되기로 서원해 놓고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살겠구나!’ 김 목사는 병원 대신교회에 가는 절체절명의 결단을 내린다.
“의사에게 가도 죽을 거, 교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요일 아침 교회로 가서 ‘살려만 주면 꼭 신학하고 주의 종이 되겠다’고 기도했지요.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온 몸이 땀에 젖고 군화 속이 땀으로 흥건히 찼더라고요.”
약속을 지키겠다고 고백하자 기적이 일어났다. 호흡곤란과 극심한 통증이 단번에 사라졌다.
숨이 차서 기다시피 올라왔던 교회 계단을 돌아갈 땐 뛰어서 내려갔다.
제대 후 군대에서 알게 된 목사님 교회를 찾아가 숙식을 해결하며 신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2년간의 공부 끝에 그는 29세에 칼빈신학교에 입학했고 10년 뒤엔 개혁총회신학대학원(현 총회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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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찬양예배 전 소년원생과의 소그룹 모임을 위해 김 목사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소년원 목사에게 가면 기적이 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는 서원대로 그는 신학 공부를 하며 고아원과 소년원 사역을 병행했다. 당시만 해도 고아원은 봉사자를 비롯해 교회의 도움이 많았다.
소년원에서는 복음성가를 행군가로 고를 만큼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상치 못한 사역의 은혜에 감격할 즈음 또 다른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교정행정 여건이 열악했던 데다 더욱이 의무행정 수준은 외부 진료기관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시절이었다.
적기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심각한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한 원생이 김 목사의 정성어린 기도 덕에 회복된 것이다.
두 달반 동안 자리에 누워있던 원생이 일어나 걸었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기도해 주러 가면서 너무 겁이 났습니다. 제가 병을 못 고친다면 사역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았거든요. 소년원을 다시 찾기 무서울 정도로 걱정이 됐지만 자나깨나 아이의 치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감사할 일은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84년 당시 배명인 법무부 장관이 전국 소년원장과의 정례 모임에서 종교시설 건립을 승인했다. 따라서 이미 원내 교회가 있던 서울·충주·춘천 이외의 소년원에도 교회가 세워지는 발판이 마련됐다.
춘천소년원장이 모임에서 김 목사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소개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장관님이 원생의 심성이 순화되는 효과가 있다며 전국 소년원에 국내 4대 종교 활동과 1인1신앙을 갖도록 허락했는데 정말 뜻밖의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때 선교 현장에선 놀라운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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